대학과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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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이란 무엇인가? _ 황희선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다.
생명과학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축적된 지식을 통해, 그 스스로가 살아있는 존재인 우리가, 우리와 마찬
가지로 살아있는 다른 존재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의 방식을 알아 갈 수있게 해준다.


생명과학은 분야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다. 생명과학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축적된 지식을 통해, 그 스스로가 살아있는 존재인 우리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다른 존재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의 방식을 알아 갈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우리의 몸과 같이 질서 잡힌 체계는 생쥐나 민들레 같은 또 다른 질서체계와 어떤 점에서 같고 또 다른가? 그들 각각의 종에서 살아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살아있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가? 예컨대 우리를 숨쉬게 하기 위해 어떤 분자와 어떤 조직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상호작용 체계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더 나아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들은 어떤 삶의 과정을 영위했던 것일까? 그러한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있을까?

물론 생명과학이 생명에 관련된 질문을 다루는 유일한 학문체계는 아니다. 가령 ‘인공생명’을 다루는 정보․컴퓨터과학이나, 물리․화학적 현상의 한 층위로서 생명현상이 갖는 특이성을 연구하는 일부 물리학 및 화학 분야, 주로 응용에 관심을 두는 농학과 의학, 철학을 비롯한 여러 인문학 분야들도 각 분야의 관심과 접근방식에 맞게 생명에 관련된 물음을 다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물음을 다루는 분야로서 생명과학이 갖는 특이성은 무엇일까? 생명과학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생명에 관련된 물음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엇보다도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개념
‘생명’(life)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생명체’라고 부르는 존재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전부, 혹은 거의 대부분 공유한다. 1) 생명체는 세포를 기본 단위로 조직화된다. 2) 생명체는 물질과 에너지를 대사하며 생장한다. 3) 생명체는 환경의 자극에 반응한다. 4)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고 주변 환경에 적응해 변화한다. 5) 생명체는 번식한다. 6) 생명체는 진화한다.
이 특성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작업은 곧 생명을 정의하는 문제와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다. 쉽게 해결할 수는 없는 과제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생명은 무질서보다는 특정한 질서를, 본질보다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생명’이라는 말은 명사형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행되는 과정을 지시하는 동명사형(곧, ‘살아있음’(living))으로 읽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 때 생명현상을 특징짓는 ‘살아있음’이란 어떤 영혼이나 생기와 같이 대상에 불어 넣거나 끄집어 낼 수 있는 실체 혹은 정수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립되었다가 다시 해체되는 물질들이 특정한 질서를 체현(體現, embodiment)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생명’은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생명’과 같은 것도 없다. 생명은 우주라는 거대한 힘과 물질의 순환계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스스로를 갱신하고 다시 해체의 길로 접어드는 어떤 현상군(現想群)이며, 어떤 질서가 물질을 기체(基體)삼아 체현되는 과정이다. (그 결과물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생명체들, 그리고 그들이 조직한 ‘환경’이다.)
이 때 생명체가 질서를 구현하는 유일한 존재자는 아니다. 컴퓨터나 컵, 흰개미의 집이나 도롱이벌레의 껍데기 역시 특정한 질서를 구현하며, 심지어는 수정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결정 패턴이나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타나는 물살무늬, 허리케인의 기류 또한 고도로 질서잡힌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현상이 갖는 특이성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현대 이론가 중 한 사람은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였다.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생명은 일반적인 물리현상에 비해 ‘평형’ 상태로 늦게 이행하며, 내부 질서의 유지를 위해 외부의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특수한 형태의 물리계라고 본다. 뜨거운 물이 시간이 지나면 식고 쏟아진 물이 다시 그릇에 담기지 않는 것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에너지와 분포의 측면에서 평준화되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하지만 생명체는 이와 달리 자신의 체온과 형태를 유지하거나 자신과 비슷한 꼴의 질서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특성을 갖는다.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la)는 생명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자기제작’(autopoiesis)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생명체를 그 외부와 가르는 생명체의 경계, 이를테면 세포막이나 신체의 표면은 생명체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부여한다. 생명체는 경계를 바탕으로 내부와 외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 네트워크를 재생산한다. 그러한 면에서 생명은 하나의 개방된 체계이자 질서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질서들의 질서’다.
따라서 자기제작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체를 그 외부인 ‘환경’과 독립시키는 관점은 무의미해진다. 정보체계로서 생명체는 ‘외부’에 대한 인식을 근간으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인식과정 자체가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식(cognition)은 생명체의 인지체계 내부에 있는 어떤 패턴을 ‘바깥으로 내놓으며’ 환경을 조직하는 ‘발제’(enaction)의 과정이다.
마투라나나 바렐라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활동했던 야콥 폰 웩스퀼(Jakob von Uexküll)이라는 학자는 비슷한 맥락에서 각 종은 그 종에 특유한 ‘주위세계’(Umwelt, 혹은 ‘환경’)를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령 박쥐가 초음파를 통해 ‘보는’ 세계는 박쥐의 신경체계와 상호작용한 결과이며, 사람이 가시광선을 통해 보는 세계는 사람의 신경체계와 상호작용한 결과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실재’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박쥐에게 자연적 환경인 ‘초음파’는 인간에게는 의식의 영역 바깥에 있고 자연적인 ‘환경’이 아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세계’(Welt)는 단순히 물체들의 집합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들의 연결방식, 즉 의미의 체제다. 그렇다면 생명은 특수한 언어를 공유하며 그 언어로 이루어진 의미 혹은 정보가 유통되고 전달되며 갱신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모두 DNA(혹은 그에 준하는 RNA와 같은 물질 등)라는 언어를 공유한다. 따라서 생명은 어떤 의미에서 ‘지적인’ 체계다. 생명체는 근력이나 화학반응에 의해 방출되는 자유에너지와 같이 양으로 측정되는 무엇이 가동시키는 기계론적 체계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조율해 내는 능력의 다발이다.
따라서 생명과학은 분자, 세포, 조직, 기관, 기관계, 유기체로서 개체, 개체군, 생태계와 같은 다양한 질서 층위가 ‘세계’를 구현하는 방식과 그 ‘삶의 형태’가 취하는 모습을 다룸으로써 그 능력의 구체적인 면면을 탐구해 간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생명현상에 접근하기에 자칫 환원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면역학이나 세포유전학과 같은 분야들 역시, 성공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대상이 되는 분자 단위가 활성화되는 맥락, 혹은 주변을 ‘해석’하는 방식을 반드시 다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의 개념’과 ‘생명과학’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간단히 살펴 볼 것이다.
생명과학의 탄생과정, 그리고 그 배경
현대의 생명과학 실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질문의 방식 및 이해 방식이 놓여 있는 지점을 알기 위해서는 생명과학의 탄생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말과 사물』이라는 책에서, 근대 학문으로서 ‘생물학’의 탄생을 추적한다. 푸코는 어떤 시대에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수용하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틀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일컫는다.
푸코의 논의에 따르면 ‘생물학’은 일반적인 과학사에서 이야기되는 것과는 달리 19세기를 전후해서야 생겨났다. ‘생명’을 독자적인 범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에피스테메가 이 무렵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근대의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들을 그 중요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분류하고, 서로 다른 종에서 유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을 비교함으로써, 생명을 관통하는 ‘시간’(혹은 ‘역사’)의 층위를 추적해 들어간다. 이 관점은 ‘생명’을 하나의 고정된 본질보다는 변화하는 ‘과정’으로 읽어낼 수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생명의 역사로의 편입’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이 역사로 편입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푸코는 근대 생물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근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심은 생명의 본질을 알기 위한 데 있기보다는, 유(類)로서 인간, 즉 인구집단(population)이 적절하게 재생산되고 건전하게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생산체계를 원활하게 유지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근대의 생물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생명과정에 대한 개입 및 통제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생명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체 스스로의 활동 또는 ‘인간’의 활동에 따라 변환 가능성을 갖는 역사적인 구성물이 된다.
이 맥락에서 볼 때 현대 생명과학은 여전히 ‘근대적’인 지식실천의 영향 속에 있다. 즉, 현대 생명과학의 중심 주제는 분자생물학, 생명공학, 보존생태학과 같은 분야에서 엿볼 수 있듯 매우 미시적인 수준(분자 단위 또는 그 이하)으로부터 생태계와 같은 매우 거시적인 수준에 이르기까지 통제와 변용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생명과학(life science)이 근대의 생물학(biology)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더 숙고해 볼 문제에 해당한다. 역사에 뿌리박은 하나의 지식체계로서 생명과학은 각 시대의 사회 및 생산관계와 접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생명과학은 근대의 생물학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근대의 정신이 독자성을 갖는 특수한 범주들을 생산하고 그 경계를 단속하는 활동에 가까웠다면, 현대의 정신은 그 범주의 경계를 와해시키거나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존재들을 접합하고, 서로 다른 체계의 언어들을 상호 번역하거나 소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활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 살펴본 내용에서 엿볼 수 있듯, 생물학의 재편에 따라 생겨난 이론적 관점들은 ‘생명’을 특수한 범주로 취급하는 근대 생물학의 지평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과학학자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지적처럼 특히 20세기 후반에 진행된 생명과학의 정보과학적 재편은 연구의 기본 술어 및 관심사를 ‘생물체’에서 ‘생체요소’로, ‘생리학’에서 ‘커뮤니케이션 공학’으로, ‘미생물학’에서 ‘면역학’으로, ‘번식’에서 ‘복제’로 바꿔 놓았다. 현대의 생명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체계에 속하는 이질적인 대상들을 그들 사이에 통약되는 보편 언어를 통해 접합하고, 유용한 결과물의 복제품을 만들어 내거나 복제의 권리를 통제하는 것을 관심사로 삼는다.
일례로 서로 다른 종의 유전자를 뒤섞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인슐린을 생산하도록 유전공학적으로 조작되고 멸균 사육된 돼지, 대규모의 경작을 가능케 해 주는 제초제 내성 농작물들, 인간의 유방암을 모방하도록 암 발생 유전자를 재조합한 온코마우스(OncoMouse™), 별도의 합성 보존제 없이 보다 오랜 기간 신선함을 유지하도록 심해 가자미의 유전자를 재조합해 만든 토마토 품종 플레이버 세이버(FlavrSavr™) 등이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근대 생물학의 상상력이 신체의 부위들을 접합해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까웠다면, 현대 생명과학의 상상력은 DNA, 즉 정보들을 접합하고 그 정보에 따라 구동되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이 맥락에서 볼 때 20세기 중반에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H.C. Crick)이 해독해 낸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 Nucleic Acid,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지구상의 생명형태가 공유하는 보편적 언어체계를 해독하기 위한 기초 방법을 처음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해 대장균, 애기장대, 생쥐 등 여러 종들의 염기서열을 해독해 내는 유전체프로젝트(genome project), 연구 결과를 정보처리 및 관리의 관점에서 다루는 생명정보학(bioinformatics)과 같은 신생 연구 분야, 그리고 연구를 통해 밝혀낸 정보에 지적재산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생명특허와 같은 신생 제도는 생명과학의 변화 경향을 지시해 주는 듯 보인다.
특히 생명과학의 연구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DNA라는 보편언어가 ‘자본’이라는 다른 보편언어와 접합되며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은 ‘순수’ 및 ‘응용’ 분야 모두에서 관측할 수 있다. 가령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라는 개념은, 생명현상의 ‘근본’을 유전자라는 정보론적이고 기능적인 단위가 스스로를 복제하며 자기-증식하는 과정으로 볼 것을 제안하며, 자본의 운동과 일견 유비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여기에 보태 현대 생명과학을 특징짓는 분자생물학 연구 중 상당수가 산업적인 응용가능성을 염구에 두고 진행되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보’가 본래 어떠한 ‘활동’을 의미하는 말이었던 것과 달리, 생명의 과정을 상대적으로 경계가 확정되고 보존, 소유될 수 있는 ‘사물’로 바꿔놓는 구실을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혹시 현대의 생명과학은 ‘생명이라는 존재’보다는 ‘생명의 소유 방법’에 대한 물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라는 물음과 “어떻게”라는 물음, 그리고 생명과학의 연구 기법들
이 절에서는 생명과학이 실제 작동하는 모습을 엿보기로 하자.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는 『이것이 생물학이다』라는 책에서, 생명현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정리한다. 이들은 각각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물음으로 구분될 수 있다.
“무엇을?”이라는 물음은 분류학(taxonomy), 형태학(morphology)과 같이 생명체를 분류하고 그 속성들을 기술하는 연구활동에 연관되어 있다. 특히 현대의 계통학(systematics)적 접근방식은 단순히 종을 동정하고 상위 분류군으로 분류하며 그들 분류군의 특성을 서술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계통학은 다양한 생명체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하고, 그 진화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연구의 근거가 된다.
반면 “어떻게”라는 물음은 생명현상을 각각 분자, 세포, 조직 및 기관, 기능 계통의 수준에서 다루는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세포생물학(cell biology), 생리학(physiology), 신경생물학(neurobiology), 면역학(immunology), 그리고 시간 차원을 강조해서 다루는 발생생물학(developmental biology) 등의 분야처럼, 다양한 조직화 수준 및 시간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생명체의 기능과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과 관련된다. 특히 현대의 생명과학에서는 ‘발생’의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 개념은 한 개체의 출생으로부터 소멸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보가 해석되는 생명체 내외의 맥락이 구성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 이를 위한 다양한 분자생물학적 연구 기법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왜”라는 물음은 주로 생명 현상의 역사적 요소들과 진화적 요소들을 다루며, 계통학, 유전학(genetics, 특히 개체군유전학), 동물행동학(animal behavior studies), 고생물학(paleobiology)에서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 “왜”라는 물음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생명현상들이 하필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논리를 밝히려는 물음이다. 이 문제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언어와 사고방식을 제공하는 이론체계로는 진화론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보태, 이러한 모든 접근방식을 포함하며 비-생명계와 생명계가 상호작용함으로써 복잡계(complex system)를 이루는 과정을 탐구하는 생태학(ecology)도 생명과학의 중요한 분야에 해당한다.
과학으로서 생명과학
생명과학은 생명이라는 현상을 다룰 때 실험적 기법과 통계적 검증, 그리고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은 과학이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향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양한 질서들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확산되는 과정이다. 시간이 지나면 맨땅에 풀이 우거지고 개미들이 퍼져 나가듯, 생명은 자신의 질서를 전파해 나간다.
생명과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통계학(statistics)은 그러한 과정의 큰 흐름을 읽어 내는 기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통계학은 연구자가 발견해 낸 어떤 현상이 단순한 ‘우연’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며, 보다 일반적인 질서가 그 현상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음을 수학을 통해 입증하는 방식이다. 생명이 단순히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질서들이 확산되는 과정이라고 볼 때, 생명계에서 통계적인 일반성이 발견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실험은 현행적(現行的)인 현상, 혹은 감각 가능한 것의 관찰만을 통해서는 알아낼 수 없는 숨은 논리를 발견해 내기 위한 기법이다. 예컨대 초파리의 ‘eyeless’라는 이름의 유전자가 초파리의 신체 형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떤 조류종에서 수컷의 꼬리가 암컷의 꼬리보다 긴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 암컷들이 긴 꼬리의 수컷들과 더 많이 짝짓기를 한 결과가 누적된 것은 아닐까? 학자들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실험을 이용한다. 원하는 유전자를 표적으로 삼아 그 유전자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신체 얼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거나 특히 어느 부위에서 많이 발현되는지를 추적하고, 수컷의 꼬리를 인위적으로 길게 혹은 짧게 만든 후 짝짓기 패턴에 발생하는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들은 과학이 지향하는 ‘객관성’(objectivity)과 맞닿아 있다. 객관성은 보통 특정한 관점에 치우치지 않는 보편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일컫는데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학자의 시점으로 가정된 초월적이고 전지적인 ‘시점’보다는, 연구를 통해 만나는 ‘객체’(object)가 표현하는 어떤 진실을 지향해야 한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실험’한다.) 과학이 지향하는 ‘객관성’은 학자가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연구대상’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때, 어떤 대답은 그 답을 이끌어내려 했던 질문, 그리고 그 대답을 해석하는 방식의 맥락에서 참이라는 점, 또한 ‘대화’는 ‘주체’와 ‘객체’가 말끔하게 구별될 수 없다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맺음말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 중 ‘우리’의 유전체를 담은 세포는 10%에 불과하며 박테리아의 세포수는 9배에 달한다. 우리의 몸은 일종의 ‘생태계’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실천 분야로서 생명과학은 생명과학 ‘외부’의 관계에 뿌리박고 있다. 연구자들 상호간의 관계 및 연구자와 연구대상과의 관계, 연구비 지원에 관련된 관행, 연구결과의 공유에 관련된 법제, 생명과학 교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모두가 현재의 생명과학을 만들어가는 중요 요소들이다. 생명과학이 생명과학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그 자신으로 판정되는 것 이외의 요소들과 더불어 하나의 ‘생태계’를 이뤄야 한다. 생명과학은 ‘고립’되거나 ‘순수한’ 체계가 아니며, 주변의 것들을 ‘먹고’ 먹을 것을 ‘생산’해내며 환경에 ‘적응’하고 ‘변이’를 일으키며 ‘번식’하는 체계다.
다양한 생명과학적 실천들의 ‘생태계’를 살펴보면, 실제의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이 글에 묘사된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가령 생명과학이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윤은 생명과학에 큰 에너지원을 보급하고 있지만, 내부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거나 특정 방향으로 편향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또한 연구가 ‘침묵하는 자연의 입을 열게 하는’ 일종의 ‘고문’ 기술로 이해되는 것은 아닌지, ‘생명’을 마치 ‘비생명’인 것처럼 다뤄야만 하는 기술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우려가 된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살아있는 존재인 우리가 그 살아있음을 통해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의 삶에 대해 배워갈 수 있는 강력한 대화의 장 중 하나다. 이 사실이 갖는 의미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할 때, 생명과학의 생태계는 더 건강하고 풍성한 모습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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