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생활
대학과 대학생활
문화론이란 무엇인가?? _ 박정수
들어가며: 광고와 문화
“한 20대 여성이 침대에서 곤히 자다가 핸드폰 벨이 울리자 벌떡 일어나 숙달된 연속 동작으로 눈 밑과 콧잔등과 입 주변을 손가락으로 정돈하고 화사한 표정으로 인사한 후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누인다. 몸 짱 가수로 유명한 20대 청년이 밤중에 너무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다 매니저에게서 온 영상전화를 받고는 급히 쓰고 있던 수건과 라면의 김으로 사우나 실을 연출한 후 위기를 모면한다.”

유명한 영상통화 서비스 광고 장면들이다. 이 광고가 선전하는 것은 영상 통화 서비스의 ‘편리함’이 아니다. 자다가 말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대는 생 ‘쇼’를 해야 하고, 야식 먹다가 말고 샤워 모드로 돌변해야 하는 생활은 결코 이전보다 편리한 생활이 아니다. 영상 통화 서비스가 없다면 이 젊은 남녀는 목소리의 톤과 어조를 살짝 바꾸는 간단한 방법으로 발신자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실용성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 광고는 안 해도 될 수고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선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방에게 어여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식욕과 수면욕까지 억제하고 프라이버시도 포기한 채 오직 타인이 기대하는 영상을 연출하기 위해 24시간 대기상태로 있어야 하는 삶을 이전보다 편리한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광고가 선전하는 것은 새로운 영상통화 서비스의 편리함이 아니라, 그 상품 소비가 확산된 세계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이다. 실용주의자의 눈에는 그저 불편하게만 보일 그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움’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없던, 세상이 기다리던” 문화의 향유자들을 호명하는 것이다. 이 광고의 메시지는 ‘말하고-듣는’ 청각 통신 매체보다 ‘보여주고-보는’ 영상 통신 매체가 더 편리하거나 발달된 매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영상통화 상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통신 문화를 창조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영상통화 상품은 반드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할 것이며, 이 신상품을 소비하는 자들은 그 새로운 문화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광고의 메시지이다. 일종의 문화 혁명을 선포하는 셈이다.

이 광고가 대변하는 것처럼 오늘날 광고 매체는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선전한다. 광고는 다른 어떤 문화 이론서보다 문화의 본질과 가치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매체야말로 문화의 기본 질료인 도구의 가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데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적 존재의 삶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생활양식으로 정의된다. 이때 자연적 삶과 인간의 문화를 구별시켜주는 핵심적인 요소가 도구의 사용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적 삶으로부터 문화적 삶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의 본질과 가치를 분석하는 것은 곧 도구사용의 본질과 가치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문화론의 가장 주요한 텍스트는 딱딱하고 난해한 이론서보다 도구의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는 광고나 대중문화, 혹은 일상생활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도구와 문화
그럼, 도구란 무엇이고, 도구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 학습된 생각 중 하나는 인간만이 도구를 제작하는 동물,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데 반해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여 자연의 한계와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도구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자 능력인 이성의 산물로 정의된다.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성의 합목적적인 기획에 따라 도구를 제작하여 자연에 지배된 미개한 삶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문화적 삶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휴머니즘에 따르면 도구는 인간 외부의 자연을 이용하거나 인간 내부의 자연(본능)을 통제하는 기술적 수단으로 인식된다. 한편으로 인간은 노동 도구를 발전시켜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욕구 대상을 추출해 내는 생산 능력을 증진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법과 제도 같은 사회적 도구를 발전시켜 인간 내부의 자연인 신체적 본능을 억제하는 통제 능력을 향상시켰다. 이런 휴머니즘은 진화론과 결합되어 인간사회는 인간 안팎의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의 크기만큼 진보한다는 생각을 낳았다. 이런 사회 진화론적 관념을 가진 근대 서구사회가 가장 발달된 사회이고 도구적 이성이 거의 없거나 아직 미약한 비서구 사회는 자연적이거나, 원시적이거나, 미개한 사회로 평가되어 자신에게 지도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또한, 사회 구성원 가운데 아이나 여성, 장애인, 하층계급, 정신병자, 부랑인, 범죄자 등 이성이 결핍된 존재들도 자연 속에 머물러 있는 존재로 간주되어 도구적 이성에 정통한 상류층 성인 남성에 의해 지도, 교정, 처벌 받아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처럼 도구와 문화를 인간 이성(정신)의 고유한 산물로 보는 서구 근대 휴머니즘은 그 ‘인간’의 함량에 미달하거나 ‘문화’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타자’(the Other)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근대적인 문화론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와 같은 휴머니즘적 문화론의 본질과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이 현대 문화론의 중심과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구와 인간, 인간과 문화,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근대 사상가들의 저작과 그런 휴머니즘적 문화론이 어떻게 제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위로 표출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문학, 역사 텍스트를 살펴봐야 한다.

도구와 문화를 인간 고유의 이성적(정신적) 산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도구를 달리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마샬 맥루한이라는 현대 문화 이론가에 따르면, 도구나 미디어는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신체의 확장이다. 도구는 이성의 설계도를 물질적으로 구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피부의 경계선 바깥으로 확장한 것이다. 가령, 핸드폰은 말하는 입과 듣는 귀를 피부의 경계 바깥으로 확장한 도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핸드폰은 확장된 입과 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핸드폰은 눈의 시각기능과 뇌의 정보 처리 기능까지 갖춘 복합적인 신체 기관으로 진화하고 있다. 가장 많은 수의 도구는 손의 확장일 것이다. 쟁기와 같은 단순한 노동도구에서 인공지능을 장착된 로봇 팔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수많은 노동 기관을 생산해 왔다. 또한 손은 노동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무기이도 한다. 창과 같은 단순한 전쟁도구에서 대륙 간 탄도 미사일까지 오늘날 인간은 피부에 느껴지는 살인의 감각 없이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적들의 신체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전투 기관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발의 기능을 확장한 이동 기관은 소리보다 빠르고 중력을 거슬러 이동할 수 있는 신체 기관으로 진화하고 있다. 눈의 기능을 확장한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가시성의 한계를 끊임없이 멀게 했고 안경이나 콘텍트 렌즈와 같은 외장형 각막으로 시력의 교정을 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컴퓨터라는 외장형 뇌의 진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오늘날 인간은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된 거대한 뇌를 갖게 되었다. 현대 문화론의 중심과제는 이처럼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서 도구가 갖는 의미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도구를 확장된 신체 기관으로 이해할 때 도구와 인간의 경계는 사라진다. 지체 장애자들의 휠체어나 시력 약자들의 콘텍트 렌즈를 그들의 손과 발, 혹은 각막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내장형 기관이냐 외장형 기관이냐는 것밖에 없다. 도구는 세계에 흩어진 인간의 외장형 신체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 흩어진 이 외장형 신체 기관을 개인의 신체에 결합하는 방식을 ‘사회적 관계’라 부른다.

인간의 신체 기능이 도구에 의존할수록 인간의 신체는 더욱 도구화된다.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신체는 말과 화살, 창과 방패와 함께 특정한 전술적 배치 안에서 하나의 전투 도구로 기능한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던 고대 제국의 관료체제 안에서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무생물체인 도구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거대한 노동 기계의 부품으로서 파라오의 종교적 염원과 제국의 관료주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보여주듯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미세하게 분절된 생산 활동의 기계적 결합 속에 인간을 거대한 자동기계의 기관으로 결합시키는 능력을 극대화한다. 도구와 생산력이 발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도구화 수준이 발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도구를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 볼 때 현대 문화론은 사이보그와 장애인의 관계,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 인간의 도구적 사용과 관료체제의 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고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 중첩시켜 보는 새로운 학문이 된다.
경제와 문화
인간이 자연적 존재와 다른 점은 이처럼 두 가지 의미의 도구적 신체, 즉 확장된 신체로서의 도구와 도구로 기능하는 신체를 가진다는 점이다. 문화란 이런 도구적 신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특이한 삶의 형식이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고 분배하고 소비하는 활동을 ‘경제’라 한다면, 경제는 단지 도구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와 결합된 인간의 신체까지 생산한다. 도구 생산의 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은 단지 인간 외부의 도구만이 아니라 노동도구와 결합된 인간의 신체, 즉 ‘노동자’라는 문화적 신체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의 노예, 중세 봉건 사회의 농노,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동자, SF 영화에 나오는 미래 사회의 로봇 등 인간 사회는 자신의 신체를 노동 도구로 사용하는 문화적 신체를 생산해 왔다.

생산된 도구를 분배하는 과정은 또한 계급적으로 분화된 신체를 생산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인간 역사를 보면 노동기관으로 기능하는 노동자는 그들을 소유한 상층 계급의 인간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생산물을 분배받는 경향이 있다.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생산물을 분배받는 몫에 따라 인간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문화적 신체를 갖는다. 인간이 생산한 도구에는 이런 계급적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적 기능이 있다. 의복이라는 도구는 단지 확장된 피부가 아니라 그것을 입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는 ‘기호’(sign)로서의 기능도 있다. 사치품만 그런 게 아니라 입고, 먹고, 들어가 살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도구에는 일정정도 사회적 신분 표시의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도구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말하는 입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1%만 소유할 수 있다는 값비싼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라기보다는 ‘나는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입의 확장이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수억 원짜리 수제 명품 시계는 그것의 문화적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들어라’며 속삭이는 손에 걸린 입이다. 도구만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 역시 기호로 기능하는 도구이다. 귀족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신체와 동작 하나 하나를 평민과는 차별화된 신분 표지의 도구로 가꾸는 일이다. 오늘날 높은 신분을 표지하는 아름다운 신체 형태는 하나의 자본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품 몸’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사회적 신분 배분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분배된 도구를 소비하는 과정은 단지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를 사용용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도구에 중독된 문화적 신체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구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는 진화론적으로 변이한다. 찰스 다윈이 자연계의 생명 종이 인간의 품종개량에 의해 변이되는 데서 자연선택의 원리를 도출한 것처럼, 인간은 도구의 생성과 변이를 일으키는 선택자일 뿐 아니라 도구의 진화과정에서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는 선택대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도구를 진화시킬 뿐만 아니라, 도구와 함께 공진화한다. 돌도끼를 사용하는 인간의 신체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인간의 신체는 질적으로 다른 신체이다. 핸드폰의 정보저장기능에 중독되면서 정작 자기 두뇌의 정보저장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컴퓨터라는 외장형 두뇌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컴퓨터와 분리된 인간 뇌의 사유 능력은 퇴화하고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상현실에 중독될수록 현실에서의 활동역량은 퇴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핸드폰에 화상 통화기능이 추가된 것은 단지 더 편리해진 소통도구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인간의 감각 작용과 소통활동에서 시각의 비중이 커지고 다른 감각은 약화되는 진화론적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도구를 소비하는 과정은 자신의 신체 역량을 소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상품화된 도구는 인간의 신체 역량을 확장시켜주는 사용가치보다는 상품 판매자의 이윤을 증대하고 상품 소비자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는 교환가치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신체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도구를 소비하기보다는 상품판매자의 이윤 증대를 위해, 사회적 신분 표시를 위해 자신의 신체 역량을 소진시키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한다. 정크 푸드 소비로 쌀 찌고 병든 몸을 비만클리닉과 병원이라는 명품 신체 제조 공장에 내 맡기는 소비를 통해 우리는 완벽하게 자본주의적인 문화적 신체를 얻는 대신 자기 신체의 역량을 고갈시켜 버린다.

이처럼 인간과 도구가 결합된 문화적 신체를 생산하는 경제활동의 의미를 묻는 것이 현대 문화론의 주요 과제이다. 경제란 단지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를 생산하고 돈을 버는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 활동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성격의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가 인간의 신체를 다루고 있는지, 우리의 신체가 그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다루는 것이 현대문화론의 핵심적인 탐구 대상이다.
정치와 문화
자연 생태계의 진화가 치열한 생존투쟁의 과정이듯 문화적 신체 역시 치열한 생존투쟁 속에서 생성하고 변이하고 진화한다. 다윈의 주장처럼 진화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투쟁으로 이뤄진다. 또한, 진화는 최종적인 완성을 향한 필연적 도정이 아니라 돌연변이의 우발성과 환경 변화의 우연성이 가득 찬 과정이다. 돌연변이로 인해 이질적인 형질을 가진 개체들은 변화된 환경에 선택되기 위해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이고 그 속에서 승리한 개체의 형질은 유전되고 패배한 형질은 도태되는 것이다. 문화적 신체의 진화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회에는 하나의 문화적 형질을 지배적인 형태로 재생산하려는 권력이 작용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문화적 돌연변이라고 할 우발적 사건과 혼종적 결합으로 무수한 변종의 신체들이 형성된다. 가령, 절대군주 사회는 군주의 절대 권능을 과시하기 위해 군주에 도전한 자의 신체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권력 장치를 마련하는데, 그와 같은 공개적인 신체형은 구경하는 신민들의 신체에 두려움과 복종심이 새겨지는 현장인 동시에 군주의 잔혹성이 생생하게 드러나 그에 대한 분노가 폭발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처형자의 신체에 대한 군주의 무제한적 폭력이 군주에 대한 무제한적 분노의 폭력을 야기함으로써 군주에게 복종하는 신민의 신체가 군주에게 저항하는 혁명의 신체로 변이되는 것이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의 집합적 규율에 복종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길러내지만 그 훈육된 신체는 자본가에게 저항하는 노동자의 훈련된 투쟁조직으로 변이되기도 한다. 또한, 학교나 군대와 같은 규율 장치는 집단적 규범과 표준화된 절차가 몸에 밴 신체를 양산하지만 그런 집단적 신체는 개인들 간의 자유 경쟁을 필요로 하는 시장의 논리와 상충하기도 한다. 가족의 규범이 몸에 밴 신체, 종교단체의 규범이 몸에 밴 신체, 공장의 규범, 시장의 규범, 민주주의의 규범이 몸에 밴 신체는 동일한 신체가 아니다. 각기 다른 규범과 행동 전략을 지닌 문화적 신체들 사이에는 항시적인 긴장과 우발적인 돌연변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런 다종 다기한 문화적 신체들 사이의 역학적 투쟁을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는 여당과 야당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적 신체들 간의 갈등과 협력 관계이다. 학교에서 양산된 규격화된 신체가 노동자의 신체와 협력할 때, 시장의 자유 경쟁 논리와 민주주의의 선거 원리와 협력할 때, 권위적인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신체가 신에게 복종하는 신체와 협력할 때 거기에 지배 권력의 정치가 있으며, 학교에서 퇴출된 변종적 신체와 공장에서 퇴출된 변종의 노동자, 민주적 선거공간에서 퇴출된 변종의 정치집단, 가정과 교회와 군대와 시장에서 퇴출된 변종의 신체들이 협력하여 지배 권력과 갈등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권력의 정치가 있다.

지배적 권력이든 그것에 저항하는 권력이든 모든 권력은 문화적 신체들 안에서, 문화적 신체들 간의 관계에서, 문화적 신체들을 겨냥해서 작동한다. 우리의 문화적 신체는 갈등하거나 협력하는 권력들이 모이는 장소이며, 지배적 권력을 재생산하거나 변종들의 저항 권력을 양산하는 장소이다. 문화적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권력 생성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의식적인 진화의 과정이라 낱낱의 분리된 개인들은 그 역사적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다만 신체적 감각과 쾌/불쾌의 정서를 통해 자신의 신체가 지배 권력의 생산도구로 기능하는지 그로부터 이탈하는 변종의 신체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놓인 사회적 조직 안에서 칭찬받고 그 조직이 요구하는 신체를 자기 역시 욕망하고, 그 욕망의 성취에서 쾌락을 향유한다면 그 사람은 지배적 권력의 생산 도구로 잘 기능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항상 변종 취급당하고 지배 권력이 욕망하기를 요구하는 신체를 욕망할 수 없거나 그 욕망의 성취에서 아무런 쾌감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변종들의 저항 권력을 생성하는 자이다. 어느 쪽이든 좋지만 가장 나쁜 것은 신체적 기쁨과 욕망이 상충하는 것이다. 아무런 쾌락도 느낄 수 없는 신체를 욕망하거나, 욕망의 대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학대하는 것, 혹은 쾌락의 결핍과 욕망의 좌절 속에서 영혼의 지복을 얻으려 하는 것, 한마디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몸에 대한 자기 배려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현대 문화론은 더 이상 자연의 영역과 문화의 영역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도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문화를 생명체의 진화 과정과 겹쳐보고, 생명체의 진화 과정 역시 권력의 미시 물리학으로 조명해 보는 횡단적 상상력 속에서 현대 문화론은 분과학문의 경계를 해체하는 새로운 사유방식을 개척한다.
나오며: 윤리와 문화
문화는 신체적이다. 문화는 인간의 신체가 도구와 결합하여 공진화하는 인간적 삶의 형식이다. 문화가 신체적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신체가 문화적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신체는 자연적인 소여물이 아니라 문화적 생산물이다. 우리는 도구를 생산하고 도구와 결합하고 도구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신체를 생산한다. 인간의 신체가 문화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 감각과 정서, 신체적 욕망과 행동 일체가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은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시계와 컴퓨터, 제도적 규범과 가상공간 등 인간이 창조한 도구의 배치에 의해 구성된다. 시계와 달력이 제도화되기 전의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은 전혀 다른 감각 형식이며, 교회당의 시계와 손목시계와 핸드폰이라는 각기 다른 시간 측정 도구는 각기 다른 시간 감각을 지닌 문화적 신체를 구성한다. 또한, 컴퓨터의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지각한다. 더 이상 공간은 ‘거리’의 감각이나 운동의 ‘질감’을 갖지 않고, 통과해야 할 점이나 가상 이미지가 생성되는 매트릭스가 되어 간다. 인간들 간의 지적 소통, 정념의 소통, 욕망의 소통 역시 문화적으로 구성되며 그런 문화적 소통 양식에 따라 경제적 관계와 권력 관계가 결정된다.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원인 중 하나였으며, 텔레비전은 대중 소비 사회의 민주주의를 일으킨 주된 매체였고,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오늘날의 전자뇌는 정치와 경제의 지형을 급속히 바꿔놓고 있다.

또한, 인간의 신체가 문화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신체 변형은 과학기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다. 유전자 복제나 유전자 변형을 통한 맞춤형 인간 제조를 다룬 SF 영화들이 양산하는 착각 중 하나는 인위적인 인체 변형이 마치 미래의 과학기술에 한정된 현상이라는 관념이다. 유전자 변형 기술이 발달하면 맞춤형 인간이 제작될 수 있는데, 그렇게 생산된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처우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마치 그런 문제들이 전대미문의 문제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맞춤형 인간 제작이라면 이미 선별적 인공수정을 통해, 태아 감별과 선별적 낙태를 통해, 인종주의적 혼인, 출산 통제를 통해, 일상적인 계획 임신과 출산 속에 존재해왔던 문제이고, 그런 맞춤형 인간의 도구화 문제라면 이미 난자, 정자, 장기 등 인체의 공여 및 상품화 문제나 노예 제도, 인신 매매, 성 매매, 노동력의 상품화 속에 존재해 왔던 문제들이다. 일란성 쌍둥이보다 유전적 동일성이 적은 복제인간들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문제제기는 넌센스에 가깝다. 복제인간이나 맞춤형 제조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기술적 출생 방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규정일 뿐이다.

인간의 신체 변형은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자기 신체에 대한 지배권을 누가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그것은 공적인 규범이나 제도, 혹은 시장경제에 의해 양도 가능한 형태로 행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 신체에 대한 자기 지배라는 윤리적 명령에 따라 행사되어야 하는가? 윤리란 공적 규범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기 신체에 대한 자기 지배이며 자기 신체의 변형에 대한 자기 명령이다. 그것은 내 신체는 내 소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있다는 태도가 아니라, 도구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매순간 진행되는 자기 신체의 변형을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것이다. 윤리란 자시 신체에 대한 자기 배려 능력이다. 그 능력이 결핍될 때 자기 신체를 권력자나 시장에 양도하려는 노예의 욕망이 싹트는 것이다.

새로운 영상통화기기 광고는 우리 신체의 변형을 명령한다. 팔을 길게 늘이고 언제든 남에게 보여줄 준비가 된 몸으로 바꾸라고 명령한다. 문화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 명령이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 종속된 노예로 만드는 명령인지 자기 신체의 소통 역량을 키우라는 윤리적 명령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문화론은 이처럼 인간과 도구가 함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 고찰이고, 그런 공진화 속에서 우리의 신체가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지, 그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한 윤리적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 변용의 탐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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