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배워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철학을 왜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철학을 배워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철학을 왜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딱 부러지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철학을 왜 배워야 하는 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기보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다.옛날 리디아 제국에 크로이소스라는 왕이 있었다.
리디아 제국은 오늘날 터키 서부 지역에 있는 광활한 제국이었다.
크로이소스 왕은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부자였다. 그가 델포이 신전과 디디마 신전에
바친 금만 해도 3톤이 넘었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에는 “크로이소스 왕 같은 부자”라는 말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가 이렇게 엄청난 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리디아의 수도인 사르데스 근처를 흐르는 팍토클로스 강이 실어다 주는 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폐를 만들었다. 그는 호박과 금과 은의 합성물로 화페를 주조해 최초로 사용했다.
이렇게 발명된 화폐는 편리해서 그때까지 현물 거래를 하던 다른 민족들도 새로운 지불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우리가 지금껏 즐겨하는 주사위 놀이도 화폐 발명과 함께 리디아의 발명품이다. 크로이소스 왕의 궁전에는 저명한 철학자나 이솝 등 유명한 인물들이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그런 크로이소스 왕을 어느 날 그리스의 철학자 솔론이 방문했다. 그는 보물 창고를 열어 솔론에게 온갖 호화로운 재물을 보여 주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솔론에게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물이 누구라 생각하시오?” 그러자 솔론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가난해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매우 부유하면서도 불행한 인간도 많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끝까지 훌륭하게 일생을 마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왕께서 찾고 계신 행복한 인간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를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신에 의해 잠깐 행복을 맛보다가 완전히 파멸해 버리는 인간도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의 대답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그는 페르시아를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포로로 잡혀 장작더미에 올라 화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장작더미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야 솔론이 했던 이야기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뒤늦게 솔론의 이름을 허공에다 울부짖듯 외쳤다. 그것도 세 번이나! 페르시아왕 키루스가 그 외침을 듣고, 궁금해서 화형을 멈추게 했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크로이소스는 과거 자신이 철학자 솔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키루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 준 크로이소스를 살려 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크로이소스를 살려 준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솔론이라는 철학자의 말이었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자만으로 거대한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그가 솔론의 말을 듣고 겸허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솔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키루스는 이후 거대한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해 수많은 민족들과 나라를 통치하며 이상적인 정치를 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은 교육적 측면에서 키루스를 모범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해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때로는 철학자의 한 마디가 여러분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철학을 왜 배워야 할까? 철학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 갈 때, 인생의 지침을 알리는 나침반 구실을 할 수도 있고, 지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제 철학을 왜 배워야 하는 지는 대충 감이 오는데, 도대체 앞으로 배워야 할 철학은 뭐하는 학문인가? 감이 잘 안 온다.
철학이 뭐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전에 철학이란 용어부터 우선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잘 이해가 안 간다.
철학이란 말은 원래 우리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옛날부터 쓰던 말도 아니었다. 일본 사람 니시 아메네가 서양어 필로조피아라는 말을 번역하면서 만든 새로운 말이다.
그런데 한문의 명철할 철자와 배울 학자를 붙인 이 번역어는 원뜻을 전혀 알 수 없다. 원뜻을 잘 모르니 점치는 일부터 술판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이야기를 일러 철학이라고 까지 말한다. 철학이란 원래의 말뜻을 살펴보자. 그리스어로 철학philosophia은 philo와 sophia라는 두 가지 단어가 결합에서 생긴 말이다. philo는 추구한다 또는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sophia는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리스어로 보면 철학은 완결된 지혜나 지식의 형태가 아니다. 철학은 참다운 지혜를 찾는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참다운 앎에 이르기 위한 부단한 학습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 앞서 활동하던 소피스트들은 지혜로운 자들로 자처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 자신을 구별해 자신을 지혜를 추구하는 자, 즉 철학자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그가 사용했던 철학자라는 말은 지혜를 아직 갖지 못했기에 참다운 지혜를 추구하는 자라는 겸손한 뜻을 지닌다.
그는 항상 자신을 무지한 자로 자처하면서 지혜로운 자들로 자처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질문을 던져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혜를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무지를 자각시켜 참다운 앎, 즉 지혜에 대한 욕구를 생겨나게 했다. 철학은 무지를 자각하고 스스로 지혜를 깨우쳐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지혜를 깨우쳐 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지식이라고 해서 곧바로 진리로 인식하지 않고 의심을 가져야 한다. 반성이나 비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진리라고 생각했던 지식이 나중에 진리가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데카르트는 우리가 의심을 통해 진리의 확실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타고난 양식(bon sens)이 있기 때문이다.『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양식 (bon sens)은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양식이란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 즉 이성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게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 이성을 가지고 기존의 진리와 전통이라 믿어왔던 것을 의심해 보고, 더 이상 의심을 할 수 없으면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데카르트가 인식의 확실성을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선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확실성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했다. 간단한 수학적 진리인 2+2가 4라는 것조차도 악마가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라고 의심을 했다.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의심하는 동안 의심하는 주체인 내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확실한 진리를 찾았다는 것 보다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보여 준 과정이다. 데카르트가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의심하고 물음을 제기했둣이, 철학은 진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철학을 완성된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완성된 지혜인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고 강조했다.
칸트는 학생들에게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 물을 때 그때 철학은 시작된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수백년전만 해도 사람들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을 철떡 같이 믿었다. 이것을 의심하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잡아다 죽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해 의심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물리학자 갈릴레이, 철학자 죠르다노 브루노가 그런 사람들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지구가 돈다는 이론을 철회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같은 시기에 죠르다노 브루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아 처참한 화형을 당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느 새 학습된 기존의 전통이나 가치에 빠져 산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행위 할 때가 많다. 우리가 이백년 전 쯤 조선에 태어났으면, 인간은 서로 평등 하다는 사상 보다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신분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신분차별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갈릴레이나 죠르다노 브루노처럼 때로는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불합리한 기존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칸트는 철학을 하려면 자기가 가진 이성의 능력을 감히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 사고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미성년의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고,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의 감독이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성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고하고, 지혜를 깨우쳐 가는 것 이전에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감히 알려고 하라! 칸트는 평생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문을 품고 철학을 했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내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가 품은 의문은 얼마나 당연한 질문인가? 그러나 칸트 이전에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칸트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까지 알 수 없는지 그 한계를 알고 싶어 했다. 모두들 신을 믿고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칸트는 과감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과연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절대자인 신이나 무한한 개념인 영원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칸트는 이렇게 물음을 던져 가면서 인간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 그리고 끝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칸트의 예에서 보듯이 철학은 스스로 제기하는 의문과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과 물음을 품는 것만으로 그것을 철학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문과 물음을 풀어내고 진정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논증하는 철학의 사유 방식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철학의 사유방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들이 행했던 사유방식, 즉 문제 제기와 해결 방법들을 배우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발견했던 문제들과 해결의 방법을 우리는 철학의 여러 학문영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학문 영역으로는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미학, 언어 철학, 인간학 등이 있다. 이 학문영역마다 고유한 철하의 문제가 들어 있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철학의 문제와 그것을 다루는 영역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논리학은 인간의 합리적 사유방식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위 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는 쉽지 않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적 훈련이 필요하다.논리학적 훈련은 잘못된 판단을 낳게 하는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해, 잘못된 지식이나 신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어떤 행동이 옳은 행위이며 어떤 행위가 잘못된 행위인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인간은 자연적 본능이 아니라,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윤리학은 인간이 따라야 할 가치가 있는지, 그러한 것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루어, 인간으로 하여금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한다. 형이상학은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는 물리적 세계의 너머에 있는 대상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제1학문’으로 불리며, 모든 존재들의 최고 원인이 되는 ‘신’, 그리고 ‘영혼 불멸’ 등의 문제들에 대해 탐구해 왔다. 인식론은 인간의 인식 조건과 능력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해 다루는 분과이다. 인식론의 주제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그리고 인식 내용과의 관계를 다루어 인간의 인식과정과 인식내용의 참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미학이란 미와 예술과 관련한 여러 가지 철학적인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고양이나 여우가 꾀꼬리 소리를 들었다면,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침을 삼켰을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예술이라는 행위를 하고 그것을 즐긴다. 미학은 인간은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한다. 언어철학은 언어의 문제를 다룬다. 언어의 생성, 발전 의미와 기능을 다루며, 인간사회에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규칙과 규범 등에 대해 배운다.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고찰하려는 학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보편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인간 이외의 생명체와 비교하기도 하고, 인간 본성의 고유한 속성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인간학은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학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을 꾀한다.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밖에도 철학에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철학의 영역 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자기가 가진 철학적 의문과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여러분들은 앞의 철학 영역들을 참고해 철학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언급한다면, 현재 서울 산업대학교에서는 <논리와 비판적 사고>, <현대사회와 철학>,<동양사상과 현대>,<현대사회와 윤리>,<미학입문> 등 전통적인 철학 영역에 바탕해서 현대의 여러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여러 강좌들을 개설해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여러분들을 도우려고 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러한 강좌들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법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