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과 테크놀로지_백욱인
기술에 대한 두가지 시각
정보사회는 정보 기술(technology)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정보 기술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확장론과 소외론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맥클루언이라는 캐나다의 미디어학자가 1964년에 쓴 유명한 책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the extensions of man)이다. 그는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 감각기관의 능력을 확장했다고 보았다.
맥클루언의 입장을 따르면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보청기는 귀의 확장이며 컴퓨터는 뇌의 확장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기술을 사용하여 생산한 모든 것이 인간 감각 능력을 확장시켰다고 본다. 그에게는 기술이 곧 미디어인 셈이다. 그래서 책,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미디어라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 옷, 도로 같은 기술의 산물도 미디어가 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결국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술유토피아(technoutopia)’의 낙관적인 전망으로 이어진다. 그의 입장을 따르면 정보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인터넷과 컴퓨터는 인류가 만들어낸 훌륭한 기술이고 이들이 인간 사회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확장론에 반대되는 것이 칼 맑스의 소외론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의 주요 요소인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본 소외론의 대표적 주장자이다. 그는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의 시발을 연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맑스는 산업혁명이 가져온 경제발전의 진보적인 측면과 억압적인 측면 두 가지 모두를 관찰했다. 소외론이란 기술의 산물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계는 생산수단이자 생산체제이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자기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자기가 만든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그래서 결국 인류의 본질, 인간성으로부터도 소외되어 불행해진다는 말이다. 맑스는 생산수단이 노동자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니까 자본-노동 관계를 혁명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소외된 인간 본질을 되찾고 인간해방을 실현해야하며 이를 위해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미디어가 도구에서 기계를 거쳐 환경으로 변화하는 가닥을 잡는 게 중요하다. 몸에 물리적으로 붙어있으면서 육체와 결합되어 있던 도구로서의 미디어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몸으로부터 독립되어 외화되기 시작하였다. 손에 쥐지 않은 도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자체로 미디어일 수 없는 수동적 사 물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는 몸과 분리되어 작동한다. 도구는 몸의 확장(extension)이지만 기계는 몸을 자신의 연장(tool)으로 만든다. 주종의 관계가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한다. 맑스는 이러한 외화의 확장이 소외를 가져왔다고 보았고 맥클루언은 이것조차 인간의 확장으로 본 점이 다르다.
독립된 사물로서의 기계는 인간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며 더 이상 육체의 직접적인 확장물이기를 그친다. 인간->도구의 방향성은 기계->인간의 방향성으로 바뀐다. 생산도구로서의 기계는 사회 전체의 범위에서 보면 여전히 인간의 목적의식에 종속되지만 개별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인간 육체를 제약하고 감각기관의 활동 범위와 운동을 왜곡하거나 제약하는 역주체(능동적 사물 actant)로 자립한다.
인간과 기계미디어의 관계는 주체와 도구가 아니라 도구와 주체의 관계로 역전된다. 전기미디어는 육체 근력과의 관계가 아니라 기호와 관련된 감각과 인지의 영역에서 확장과 왜곡과 축소를 가져왔다. 그것은 중추신경의 확장일수도 있지만 중추신경의 왜곡일수도 있다. 확장 자체가 왜곡과 과장을 가져와 균형을 무너뜨리고 다른 감각을 축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은 육체와 미디어를 분리시키는 대신에 정신과 미디어를 결합시켜 새로운 ‘인간-도구의 결합물(사이보그)’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이기에 도구, 기계의 단계를 넘어 환경이 된다. 전자 시대의 정점인 네트워크 사회에서 인간은 드디어 미디어 환경 속에 존재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미디어 환경이라는 의미에서 현대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미디어 생태학이 되는 것이다.
맥클루언의 전통을 이어받는 미국의 '미디어 생태학 모임(Media Ecology Association)‘은 인공물이 인간의 지각체험과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확산하고 있다. 인간과 인공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추세를 보면 마르크스의 '소외론' 전통을 이어받는 경향과 맥클루언의 '인간 능력 확장론'을 지지하는 입장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존재한다.
인간과 디지털 사물의 관계 및 디지털 존재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주요한 연구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정보 기술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
확장론과 소외론이 기술이 인간에 미친 결과를 둔 평가라면 기술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평가에 따라 낙관과 비관의 전망이 엇갈린다. 낙관론은 새로운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보사회가 당연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본다. 맥클루언은 텔레비전이란 신기술 미디어가 지구촌이란 새로운 인류문명을 초래할 것으로 보았다. 1920년대에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을 때 독일의 브레히트라는 극작가는 이런 신기술이 사회 혁명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았다. 1960년대에 케이블 텔레비전이 미국에 등장했을 때 이것이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마찬가지로 인터넷이 1990년대에 대중화되기 시작할 때 인터넷이 직접민주주의를 확장시키고 더 많은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와이어드(Wired)’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이런 낙관론을 퍼뜨렸다. 그 결과 1990년대 말에는 정보기술이 행복한 사회를 가져오리라는 환상이 널리 퍼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입장을 대변하던 이들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디지털 기술이나 디지털문화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이 바로 디지털 사회가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사회를 수평화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리라고 보았던 대표적인 낙관론자들이다.
현대 기술에 대한 비관론적인 입장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대표된다. 그들은 1930년대 문화산업이 확장되고 이것이 대중문화의 만개로 이어지는 흐름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비판은 문화산업이 대중을 놀고 마시고 먹는 단순 차원으로 빠뜨려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문학자 가운데는 기계문명에 대해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계문명을 비판하거나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은 이미 18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활성화될 때 러다이트를 통해 진행된 적이 있다.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현대문명과 기술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800년대 중반 도시 문명과 의도적으로 단절하고 자연과 직접 대면하면서 ‘야생(wildness)‘의 직접성 세계 속에서 생활했다. 기술에 대한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은 1990년대 중반 유나 버머라는 사람의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잘 알려졌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학자였는데 현대문명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다. 현대 기계 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사회악을 부른다고 본 그는 거대 언론사와 대중매체에 대해 극심한 혐오감을 가졌다. 그는 사제 폭탄을 만들어 언론사에 소포로 보내 자신의 주장을 실으라고 위협했다. 결국 FBI에 체포되었다. 지금도 유나 버머로 대표되는 기술혐오론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들은 기술과 정보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갖고있다. 기술혐오주의자들에게 기술은 인간 확장이 아니라 소외이고 불행한 사회를 가져오는 장본인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행동방식으로 현대문명의 기본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극단적인 낙관론과 비관론 사이에 세 번째 관점이 존재한다. 무조건 비관하거나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인터넷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은 열린세계와 닫힌세계를 둘 다 가져 올 수 있다. 닫힌세계는 비관론의 입장이고 열린세계는 낙관론의 입장이다. 자유로운 유토피아냐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지는 디스토피아냐?이 둘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보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를 실천의 입장에서 고민해야 한다.정보사회는 사회구성원의 실천에 따라 디스토피아도 될 수 있고 유토피아도 될 수 있다
정보기술과 통제
정보사회는 통제 기술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정보사회는 사이버세상을 가져왔다. 컴퓨터를 매개로 형성되는 새로운 현상을 가리키는 '사이버(cyber)'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은 ‘kubermetes’ 인데 이는 ‘키를 조정하는 키잡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대 컴퓨팅의 원조격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기능적인 과정을 통제하여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기술 및 체제를 의미한다. 사이버네틱스의 원조인 노버트 위너가 피드백 시스템을 이용한 원격 요격장치를 개발했고, 샤논이 잡음없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연구했던 이유도 기능적인 과정을 통제하여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기술 장치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컴퓨터와 정보사회의 탄생은 사이버네틱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베니저라는 미국의 사회학자는 정보사회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로서 ‘제어혁명(control revolution)‘을 꼽는다. 여기서 제어혁명이란 ‘볼을 잘 컨트롤 한다’ 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어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제어란 목적에 이르기 위해 대상과 환경을 잘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뜻이다. ‘제어혁명’은 베니저가 미국사회를 대상으로 정보사회가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나를 연구하면서 사용한 개념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상품이 생산되어 시장에 유통된 후 최종적으로 소비자에 의해 소비된다. 생산과 유통 소비 각각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데이터와 정보가 발생한다. 이런 데이터와 정보가 발생되면 시의적절하게 데이터와 정보를 처리하여 다시 생산과 연결시켜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포항제철에서 철강을 생산한다고 가정하자. 철강 생산에는 에너지원, 원자재, 노동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의 원료와 노동력이 생산 공정에 투입되어야 한다. 한편 공장에서 생산된 철강은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여 때와 장소를 놓치지 말고 빠른 시간 안에 유통되어야 한다. 따라서 언제 얼마만큼 생산하여 어떤 시장에 언제까지 보내는지에 관한 정보에 맞춰서 생산과 유통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소비량을 예측해야 한다. 이처럼 생산-유통-소비의 단계를 통틀어 다음번에는 얼마만큼의 생산을 언제까지 마쳐야 하는 지에 관한 여러 가지 데이터와 정보들이 생성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무조건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얼마나 생산해야 되느냐, 그리고 유통은 어떻게 예측관리해야 하는지, 시장 상황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를 처리해야 될 필요성이 생겨난다. 그런 것들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면 자본과 상품의 원활한 순환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각종 정보 기기들이 발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세기 산업혁명기에 이미 정보사회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베니저가 주장하는 ‘제어혁명’론의 요지이다.
제어혁명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서 생산품에 대한 생산 유통 소비 분배를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 조절하고 통제하고 제어할 필요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생겨난 것이 제어혁명이고 이것이 현대 정보사회의 기반을 이루었다는 것이 베니저의 ‘제어혁명론’이다. 이 이론의 장점은 정보사회의 기원을 단순히 컴퓨터나 네트워크 같은 기계의 출현에서 찾지 않고 자본주의 발전과 연관해서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관련 기기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 있다.
모르스 부호를 사용하는 최초의 전신 통신이 1840년에 개발되었다. 이후 철도 운송에 관한 제어를 담당하는 철도 전신, 그 이후에 전화, 그 다음에 이런 정보들을 처리하기 위한 정보 기기가 발명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계산기가 더 발전해서 컴퓨터가 만들어졌고 이런 컴퓨터가 다시 온라인 네트워크와 연결되면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이르게 되었다. 컴퓨터통신은 이제 정보혁명의 핵심을 차지한다.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까지 깊숙이 들어온 사회 이것이 정보사회이다.
기술과 사회 - 구성주의와 생태주의
지식은 과학과 기술로 구성된다. 사물의 구조와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 과학이다. 과학은 바깥 사물을 내화하여 그것을 분류 유형화하여 법칙을 파악한 다음 특정 대상에 대한 지식으로 외화된다. 그래서 과학의 영역에서는 감각인지를 매개로 한 외부 대상과 주체간의 인식 문제가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과학은 외부의 사물이 인간의 인식에 포착된 결과물이다. 외부 사물을 추상화하여 법칙으로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숫자였다.
과학은 외부의 사물을 향한 의식의 지향성이 획득한 결과물로 구성된다. 기술은 외부의 사물을 향한 노동의 지향성과 관련된 지식이다. 도구와 미디어는 인간과 외부 대상을 매개한다. 그래서 기술의 역사는 사물을 다루는 손기술의 노우하우와 깊게 닿아있다. 도구로 자연의 대상에 가하는 인간 노동의 모든 방식에는 기술적 지식이 들어있다. 기술은 인간 지식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고 전체 지식사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한다.
18세기 백과사전에는 과학과 기술 사이에 위계나 분리가 없었다. 과학과 기술을 지식으로 본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안과 밖의 짝으로 지식의 두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19세기 이후 종종 분리와 대립의 틀로 받아들여졌다. 머리와 손의 분리, 구상과 실행의 분리, 과학자와 기술자의 분리,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분리, 두문화론이 그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지식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계속 높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을 과학의 아랫 것 정도로 취급하거나 하급 지식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술의 도구적 합리성이 비판적 지식을 대체했다는 마르쿠제의 비판이나 현대 지식에서 수행성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료타르의 한탄은 기술이 현대에서 차지하는 지식으로서의 위상을 거꾸로 반증한다. 20세기 포디즘 이후 기술의 과학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비판철학은 이런 경향에 대한 전통 과학의 대응이었다. 기술을 지식의 중요한 축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그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기술의 도구성이나 수행성에 대한 비판 작업은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기술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발전하여 사회적 환경의 일부가 된다. 동시에 기술의 사회적 응용과 전개는 새로운 사회 환경을 구성한다. 기술은 인간의 생활을 둘러싼 환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점에서는 정보통신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구성주의는 기술의 자율적인 영역을 부정한다. 과학기술구성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 기술생태주의는 기술의 산물은 스스로 자율성을 지니면서 거꾸로 사회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다소 도식적이겠지만 기술구성주의가 기술을 사회의 종속변수로 본다면 기술생태주의는 사회를 기술의 종속변수로 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술생태주의는 뉴미디어, 컴퓨터, 네트워크 등의 신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곧 기술이 독립변수이고 인간과 사회는 종속변수로 취급된다. 이에 반하여 사회구성주의는 인간과 사회의 변화, 혹은 사회집단간의 관계가 기술의 내용과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해명하려 노력하였다. 기술결정론과 사회구성론간의 논쟁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정보통신기술은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이런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발전은 삶의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은 개개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보통신 사용자는 정보기술의 전개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터넷을 포함한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이 일상화되면서, 정보통신기술의 기술적 차원뿐 아니라 그 사용과 관련된 사회적 차원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사용자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전개는 새로운 사회영역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에 이해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도가 크고 그만큼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보사회론
디지털 존재에 대한 분석과 개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인터넷이 대중화의 시동을 걸 당시에는 기술유토피아주의 낙관적 열광에 바탕을 둔 정보 고속도로나 인터넷 확산에 관한 각종 정책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1995년 출간된 네그로폰테의 '빙 디지털(Being Digital)'이라는 저서는 디지털화하는 사회에 디지털로 참여하기를 권고하던 달콤한 초대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니고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이 대중에게 소개된지 불과 5년도 안 되어 인터넷 없이는 못 살 정도로 사회와 경제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졌다.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미국 '디지라티'(사이버 정보화시대의 신흥 엘리트를 통칭)에게 중요한 것은 '디지털 빙'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가 아니라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것(‘빙 디지털’=디지털 되기)이었다. 미국은 디지털 존재를 만들고 확산하면서 전 세계의 지배권을 확장하는 디지털 제국으로 우뚝 서기에 이르렀다. 이런 정보 제국주의적 흐름에 대해서는 일찍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디지털 경주의 선두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들에게 디지털이란 존재와 그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철학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묻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와중에서 정보사회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적 분석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네그리의 저서 '엠파이어(Empire)'는 디지털 혁명을 앞세운 미국 자본주의의 흐름을 '제국'의 형성이란 차원에서 파헤친 대표적인 비판서이다.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에 관한 3부작은 정보사회에 관한 사회과학적 연구의 방식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이데올로기라도 그런 이데올로기를 낳은 사회적 조건이 사그라지면 여지없이 파탄을 맞게 된다. 현실은 어떤 학술적 비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 해독제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신경제의 허실이 드러나자 거품처럼 끓어오르던 '새로움'과 '대박'의 인터넷 이데올로기들은 순식간에 꺼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이 디지털 세상의 모양을 꼼곰하게 되짚어 보는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디지털이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문학적인 인식과 디지털 세상에 대한 반성은 디지털 존재의 확산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다. 이미 인터넷은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였고 디지털 존재는 도처에서 우리와 조우한다. 이제 '디지털 만들기'만큼이나 '디지털과 만나기'가 중요해진다. 디지털 존재는 0과 1의 기호로, 디지털 이미지로, 온라인 시장으로, 채팅으로, 패러디로, 신경제로, 온갖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며 우리 사회에 출현한다. 디지털은 우리 사회 내부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디지털 사물은 외화된 지식노동의 산물인 동시에 하나의 객관화된 사물이고 인간에 대립되는 하나의 존재 자체로 현존한다. 그런데 디지털 존재는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디지털 존재는 다른 인공물과 다름없다.
그래서 디지털과 인간, 지식과 인간 간의 관계가 특히 실천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다. 레비의 '집단지성'론이나 프랑스 에베르-쉬프랭의 '지식상호 교환 네트워크 운동(MRERS)', 그리고 미국의 레식 교수가 전개하는 '디지털 공유(digital commons)'운동은 디지털 시대의 지식과 만나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 모색이자 실천이다. 50여년 전에 포퍼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란 저서에서 전체주의적인 사고와 사회체제를 비판한 바 있다. '지식 기반사회' 혹은 '정보사회'로 불리는 현대 사회에도 지식의 공유를 가로막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 존재한다. 제국과 거대자본, 디지털 독점체들이 그것이다. 인터넷은 닫힌 지식을 열린 지식으로 만들기에 아주 적합한 토양을 마련해 주었지만 디지털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의 끝없는 확장은 디지털 지식과 인간의 만남을 제한한다.
디지털 세상에 침투한 지적 재산권 관련 법률은 열린 소스와 열린 생각을 보장하던 인터넷의 자유로움에 커다란 장애물로 대두하고 있다. '코드'라는 책에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규제 방식을 분석하여 유명해 진 레식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아이디어의 미래'에서 디지털 세상에서의 공유물이 처한 운명을 분석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적 공유물(intellectual commons)'이 빈약한 곳은 공원도 없고 모든 산야가 온통 사유지의 '접근불가'라는 팻말로 봉쇄된 삭막한 나라와 같다.
게걸스러운 탐욕에 물든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과연 창의적인 지식이 만들어질까? 초고속망을 타고 달리는 정보와 지식이 온통 장사꾼의 손때가 묻은 것일 때 더 이상 우리에게 참다운 지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