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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과거에 대한 서술 혹은 담론
김택현
역사라는 말에는 ‘과거 혹은 과거의 사실들’이라는 의미와 ‘그 과거(의 사실들)에 관한 서술 혹은 담론談論’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역사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접할 때, 이 두 가지 의미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에 관한 여러 문제들은 그 두 의미의 일치 여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역사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중 후자, 즉 과거에 관한 담론의 구성과 관계된 학문이다. 우리는 과거를 직접 방문할 수 없으므로, 과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는 과거에 관한 담론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역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학과 과거의 사실
과거에 관한 서술-담론으로서의 역사학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연구방법론, 그리고 여전히 역사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사고방식은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서술을 강조해 온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증주의positivism’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서양의 과학혁명과 연계되는 철학으로서 영국의 베이컨F. Bacon에 의해 제창된 ‘경험주의’는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지식은 그 대상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서 유래한다는 사고방식이다. 19세기의 프랑스 사회학자 콩트A. Comte가 확립한 ‘실증주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의 변화 법칙을 알 수 있듯이, 유사하거나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인간 사회의 외적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운동과 변화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특히 실증주의 사회학은 경험으로 입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지식, 즉 실증적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며, 사회의 본질이라든가 심층 구조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고 실증될 수 없는 것들을 연구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이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 역사학 분야에서 ‘경험-실증주의 역사학’을 확립한 인물이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다. 그는 경험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자 어떤 지식이 참된 것인지를 경험으로 확증해 줄 수 있는 재료인 ‘원原사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해 그 진위 여부를 검증한 다음,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일체의 판단이나 평가에서 벗어나 그 사실들을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최선의 역사 연구 방법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적인’ 역사 연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랑케는 이 과학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 신의 의지가 인간의 역사에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료 수집의 중요성, 사료에 대한 엄밀한 검증, 선험적인 신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난 불편부당한 역사 서술 등을 강조하는 랑케의 경험-실증주의 역사학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의 사실들은 그것을 연구하는 역사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는 무관하게 역사가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둘째, 그 사실들은 역사가에 의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재현’될 수 있다. 셋째, 그 재현이 정확한 것인지 여부는 역사가의 재현과 재현되는 사실들의 ‘일치’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전제들 위에 서 있는 랑케의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적 역사 연구는 19세기 중반 이래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근대 역사학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고, 그러한 경험-실증주의적 방법이야말로 역사학의 과학성, 객관성, 진리성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과거는 역사가의 편견이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며, 역사가는 아무런 편견이나 의견을 개입시키지 않고 과거의 사실들을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을까? 또한 역사가는 가능한 모든 사료들을 수집하고 검증해서 과거의 모습을 원래대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것일까?
지식-권력으로서의 역사학
과거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을 것이다. 이 사실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거나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것이 단순한 사실과 구별되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이 인과관계라든가 시간적 선후관계와 같은 일정한 원리와 규칙에 따라 배열arrangement되고 서술description되고 해석interpretation되고 평가evaluation됨으로써 그 역사적 사실에 관한 ‘역사 지식’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지식은 ‘역사적 진리’로 제시된다.
이 역사 인식 과정 혹은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의 생산과정의 행위 주체는 당연히 ‘역사가’다. 역사가는 이 과정의 처음, 즉 단순한 사실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는 단계부터 개입한다. 현재의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택한다. 이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만 과거의 사실들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실들과 살아 있는 현재의 역사가의 관계는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 관계는 역사가가 능동적 주체로서 수동적인 객체인 과거의 사실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다. 다시 말해, 인식 대상(과거의 사실)과 인식 주체(현재의 역사가)라는 인식론적 구조 안에서 역사가는 주인 혹은 지배자로서의 존재론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E. H.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과거의 사실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엄격히 말해 대화라고 할 수 없다. 대화가 가능하려면 대화의 당사자들이 상호 평등한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들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에 대해 지시를 하고 명령을 내리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의 생산은 역사가와 사실들의 불평등한 권력관계하에서 역사가의 주도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진리로 생산된 역사 지식은 학교와 같은 제도에서의 교육을 통해, 혹은 서점에서의 역사책 구입을 통해, 혹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 이 유통과 소비의 과정을 거쳐 과거의 사실에 관한 지식이 집단적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과거에 대한 사회집단의 ‘공유기억commemo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집단은 역사 지식의 소비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이며, 이들의 역사적 사고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도 역사가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이른바 역사의 주체로 민족이나 계급, 또는 남성이나 백인 등을 내세우면서 과거에 관한 역사 지식들을 생산하고 그것들을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 지식을 소비하는 사회집단은 역사가가 내세운 주체의 시선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고 역사가가 설정한 범위 안에서 과거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독자들에게 과거를 알게 해주는 것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신이 생산한 역사 지식 안에서 역사를 인식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며, 그 지식을 역사적 진리로 수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가가 만들어 독자 앞에 내놓은 역사 지식은 그것의 생산과정에서부터 유통과 소비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시선과 역사적 사유를 제약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역사학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일종의 지식-권력knowledge-power의 성격을 지닌 담론 체계인 것이다.
역사적 진리와 객관성
그런데 역사가는 자신이 생산한 역사 지식을 진리로 제시하면서 흔히 그 앞에 ‘객관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주관적인 역사 지식은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에서 ‘객관적 진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험-실증주의 역사학에 따르면, 과거의 사실과 일치하는 서술과 해석과 평가를 통해 생산된 역사 지식이 과거의 사실과 일치할 때, 그 지식은 객관적 진리가 된다. 그러나 사실들과의 권력 관계 속에서 역사가가 생산한 역사 지식, 그리고 그것의 유통과 소비의 과정에서 독자의 사유를 통제하는 역사 지식이 과연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위와 성격을 지닐 수 있을까?
‘객관적’이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첫째,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의 의식)로부터 독립해 있고 그것의 외부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식 주체의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인식 주체의 인식에 정확하게 반영되거나 투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인식과정 안에 인식 주체의 감정이나 편견, 또는 특정한 견해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세 가지 의미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첫 번째의 것은 ‘객관적’이라는 용어의 존재론적 의미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것은 인식론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역사 지식이란, 인식 주체인 역사가가 자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과거의 사실들을 어떠한 감정이나 편견 없이 마치 백지 상태에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 인식에 반영한 뒤, 그 사실들에 일치하도록 서술하고 해석하고 평가해 만들어낸 지식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 지식은 객관적 진리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식 대상은 인식 과정에서 인식 주체의 의식에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반영된다. 인식 주체는 그저 자신의 외부에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의 ‘순수한’ 인식 행위를 투사하면 된다. 이러한 인식론이 이른바 ‘기계적 반영론mechanic reflection theory’이며, 이 이론에 기초해 진리를 주체의 인식과 인식 대상의 일치로 간주하는 진리론이 ‘조응이론correspondence theory’이다.
그러나 과연 이 같은 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식 주체인 역사가가 어떠한 편견도 없이 과거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객관적인 역사 지식과 진리를 생산할 수 있을까?
역사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과거에 관한 담론들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현재의 역사 속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아 일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다. 그의 존재 자체가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면, 그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는 그의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현존 사회와 역사,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식, 외부의 어떤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텅 빈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역사가의 인식 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인식 행위의 주체인 역사가의 사회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재하는 역사가의 부재하는 인식 행위를 통해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가 생산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인식과정에, 그리고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의 생산과정에 역사가는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주관적 지식과 진리는 왜곡이며 오류이며 거짓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객관적 지식은 진리이고, 주관적 지식은 거짓이거나 오류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반영한다. 객관적인 것과 객관적이지 않은 것, 진리인 것과 진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보편적 기준이나 합의는 불가능하다. 설령 그런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고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지식이 객관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마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전제하거나 주장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주관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성’을 주관성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해야 한다.
역사학과 이데올로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진리로 통용되는 역사적 지식은 있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또한 모든 진리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 사실 자체가 정치권력에 의해 은폐되거나 조작되는 경우엔, 진리임을 자임하는 지식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진리가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이 곧 진리인 것은 아니다.
사실에 근거하면서 진리로 통용되는 수많은 역사 지식에 관해 그것이 정말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지식들이 당시의 사회에서 왜 진리로 통용되며, 그것이 진리로 통용됨으로써 발휘하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효과란 곧 ‘이데올로기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ideology’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원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비판세력들을 이데올로그ideologue, 즉 공론가空論家로 부른 데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동시대에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疏外가 낳은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거짓이나 허위로 간주하거나, 단순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이 특정 정치 이념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떤 의식이 허위인지 허위가 아닌지를 판정케 하는 보편적 기준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운 사회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의 역사는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이나 개인들 간의 갈등과 대립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 속에서 한 사회의 지배 집단은 늘 자신의 지배를 항구화하거나 공고화하기 위해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권력을 쥔 엘리트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기관이나 학교, 군대 등과 같은 지배 장치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는 각종 지식과 담론을 생산해 그것들을 진리로 유통시키고 소비시켰다. 이데올로기란, 바로 권력의 작동에 의해 진리로 믿어진 어떤 지식, 혹은 어떤 사실에 대한 지식이 그 사실과 일치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도 실제로 일치하는 것처럼 상상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담론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향해 작동한다. 따라서 한 사회의 구성원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일정한 이데올로기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일원인 역사가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역사가가 생산하는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역사 지식은 과거를 정확하게, 실재reality대로 밝혀주는 지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지식’이다. 그렇다면, 역사 지식의 생산과정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역사 연구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가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곧 역사적 사실의 배제이기도 하다. 역사가에서 유래하는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사실을 선택했는가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배제했으며 왜 배제했는지, 배제함으로써 무슨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선택이 의식적인 반면 배제는 무의식의 작동일 수 있고, 선택된 것은 가시적이지만 배제된 것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자 하고 진리 생산자이고자 하는 역사가들이 가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그가 선택한 것에서가 아니라 배제한 것에서부터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에서 과거의 재현과 언어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해 사실의 배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언어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의 실재를 투명하게 혹은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도구로 간주해 왔다. 그러므로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는 그 언어로 재현되는 ‘사실’이었다. ‘사실’이 발견되면, 언어는 정확하게 그 사실을 재현할 수 있고 그것에 관한 진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과 진리관에 따르면, 과거의 사실은 언어 ‘이전’에, 언어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실이 실재한다는 것을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사실을 실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언어이며, 사실은 언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존재한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히 과거 사실의 반영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구조화하는 체계다.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이미 주어져 있는 언어 구조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언어 구조 안에서 언어의 의미는 역사적 시기와 사회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하지만 그 의미를 공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한 사회의 지식-권력을 생산하는 엘리트들이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에는 대개 지배 엘리트들의 견해와 사고방식이 투사되어 있다. 이들에 의해 의미화된 언어의 구조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언어 구조 안에서 과거를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에 대해 인식할 때, 그 인식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배 엘리트들이 구성해 놓은 언어 구조,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과거를 인식하는 그들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한 과거의 인식과 재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은 늘 자신의 권력과 지배적 지위를 위험하게 만들거나 그것에 거슬리는 사실들을 감추려 하면서 자신들이 인식한 대로 세계를 인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들이 결정한 언어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내세우거나 자신들이 구성한 지식-담론과 진리 주장에 거역하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가가 재현한 과거의 사실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의 사실에 관한 언어적 구성에서 역사가의 이데올로기를 포착해 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학이란 과거의 사실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언어로 실재하는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에 대한 ‘읽기reading’의 학문이다.
그리고 역사책이란 과거의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문자 매체가 아니라, 비판적 읽기가 필요한 텍스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읽을 때 거기에 담겨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믿거나, 아니면 과거가 그 사실대로였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책이 전하고자 하는 역사 지식과 역사적 진리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 책의 이데올로기적 역사 지식이 권력으로서 어떤 지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등을 생각하는 ‘비판적 읽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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