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1부.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1부 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인문학,
'인간다움' 을 향한 욕구
이현우
인문학人文學, 말 뜻대로 하자면 그것은 ‘인문’에 대한 배움이고 공부다.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서양의 인문학Humanities에 대한 풀이와 다르지 않다. 또 한자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인문’이란 말을 ‘인간과 인간의 문화’로 넓게 풀었다. 그것은 ‘인문人文’이란 한자어의 기원적 용례를 고려한 것이다.
인문이란 말의 용례는 주역의 한 궤에서 읽을 수 있다. “천문을 관찰하여 그로써 때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그로써 천하를 교화시킨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 여기서 ‘인문학’과 대비되는 것은 ‘천문학’이다. 동아시아적 ‘천지관’, 혹은 세계관에서 천지만물의 우주는 크게 천문이 뜻하는 ‘자연세계’와 인문이 뜻하는 ‘인간세계’로 나뉜다. 천문-인문은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양분이며, 우리가 관찰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두 대상세계다. 그 대상세계에 대한 ‘앎’은 목적과도 연결된다.
천문을 공부함으로써 ‘때의 변화를 살핀다’는 말은 자연의 무늬, 곧 자연의 변화와 그 이치를 앎으로써 그에 맞게 처신하고 대처한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겠다. 그리고 인문을 공부함으로써 ‘천하를 교화시킨다’는 말은 인간의 무늬, 곧 인간의 도리와 풍속 따위를 앎으로써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두 가지 배움과 앎이 모두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이란 말의 의미는 이렇듯 한자적 어원을 더듬어보는 것으로 모두 해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에 형성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의 대응어, 곧 번역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사회’ 같은 기본적인 어휘도 서양어 ‘필로소피philosophy’와 ‘소사이어티society’의 번역어로, 근대에 새롭게 주조된 말인 것과 마찬가지다.
‘후마니타스’란 본래 로마인들의 인문적 소양을 뜻하는 말이었으므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란 그러한 인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공부를 말한다. 보통 문법, 수사학, 시학, 역사가 공부의 내용이었다. 이것은 중세 대학의 커리큘럼인 3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4과(산술, 음악, 기하학, 천문학) 가운데 일부를 계승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대학의 편제로 이어지고 있다. 곧 인문대학을 구성하는 것은 문학文學과 사학史學과 철학哲學 전공이며, 이를 ‘문·사·철’로 약칭하기도 한다. 인문학은 이 문·사·철에 대한 공부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문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인문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공부를 뜻했지만, 근대 학문체계가 형성되면서 ‘인문’학보다는 인문‘학’으로 방점이 이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근대 대학이 학문 공간으로 제도화되면서 자연스레 연구대상의 상이성보다는 연구방법의 보편성과 공통성에 더 주목한 결과다. 이때 ‘엄밀한 학學’으로서 사이언스science의 모델이 된 것이 자연과학이었다. 그러한 경향에 따라 인문학의 각 분야들이 전문화되었고, 인문학은 인문적 교양을 뜻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전공분야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에서의 인문학 공부도 대학생이라면 갖춰야 인문교양 공부와 전공자를 위한 인문학 각 전공과정의 공부로 나뉜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교양’이란 말은 ‘문화’와 함께 ‘cul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는데, 본래는 토지의 경작이나 가축의 사육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정신적 능력의 계발과 육성이나 교육이란 의미로 확장되었다. 즉, 그것은 교육을 통해 육성된 정신의 상태를 말한다. 수련과 도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교양의 이념은 ‘호모 쿵푸스Homo Kungfus’의 이념이기도 하다. ‘쿵후工夫하는 인간’, 곧 ‘공부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은 ‘호모 부커스Homo Bookers’, 곧 ‘책을 읽는 인간’이다. 이러한 명명이 시사하는 것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 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 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이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얻는 과정이고, 인간다움에 이르는 필수적 여정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 자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인간다움을 갖췄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여기서 ‘인간답다’는 우리말은 세 가지 정도의 뜻을 갖는다. 첫째, 인간 같다. 인간다움이란 ‘인간 같음’이란 뜻이다. 그 말은 곧바로 ‘같잖은 인간’이 있다는 걸 전제한다. 둘째, 인간이 되다. 인간이란 ‘자라나는’ 존재이자 ‘되어가는’ 존재란 뜻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포함한다. 따라서 ‘덜 된 인간’도 있다는 것을 ‘인간다움’이란 말은 상기시켜준다. 끝으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한다. ‘인간다움’은 거꾸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못하는 ‘값싼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또한 일러준다. 인문학 공부가 ‘그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때 공부는 ‘인간 같기’, ‘인간되기’, ‘인간 값하기’를 위한 공부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이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자기를 정립하고 확장하는 공부다.
‘자기정립’이란 무엇인가?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일종의 자기비판이지만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다. 곧 자신의 명확한 주관과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말하고 남의 의견을 좇아 짖어댄다면 이탁오의 자탄과 마찬가지로 ‘한 마리 개’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정립을 위한 인문학 공부란 ‘한 마리 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이기도 하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교육과 수련을 통해 앎과 행함을 일치시킨다는 의미에서 몸으로 한다. 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사실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공자는 말했다. 거기서 배움(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힘(習)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다.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므로, 어미 새에게서 비행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 날갯짓을 하는 것이 바로 ‘습’이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배움의 기쁨이고, 학습의 즐거움이다. 그것이 이론과 실천의 합일이고 일치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공부는 무엇보다도 ‘인문 학습’이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이러한 학습을 실천하기 위한 방책은 기본 독서력을 기르는 것이다. 단순히 책을 읽을 줄 안다는 의미의 독서력이 아니라, 인문 고전과 교양서를 읽고 소화해 내기 위한 독서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예컨대,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대학생활에서 독서 목표치로 정할 수 있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닌 ‘고전’이나 ‘세계명작’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인문·사회과학 교양서를 말한다. 이런 분량의 책을 적어도 대학 4년 동안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이다. 자기만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지만, 여러 권장도서의 목록을 참조할 수도 있다. 또한 관련 교양 강좌를 적극적으로 수강함으로써 독서를 ‘자발적 의무’로 강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강의실의 토론이나 세미나를 통해서도 자신의 독서를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다. 그렇게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평탄해진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이다.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인문학을 구성하는 여러 전공은 편의적으로 어문학 계열과 사학 계열, 그리고 철학 계열로 나뉜다. 어문학 계열에는 국어국문학을 필두로, 영어영문학, 중어중문학 등의 외국어문학 전공 학과들이 배치되어 있고, 각 전공학과에서는 해당 언어의 습득과 문학·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위한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사학 계열은 흔히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전공으로 세분되며,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바탕으로 각 지역별, 시기별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철학 계열은 크게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전공으로 나뉘지만 학부 과정에서는 보통 이러한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철학의 기본 개념과 철학사, 그리고 존재론과 윤리학, 형이상학 등 철학의 하위분야에 대한 학습이 이뤄진다.
그렇다면, ‘문·사·철’ 이 세 분야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먼저, 문학은 문학연구를 말하며 문학작품을 그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작가와 독자, 그리고 언어와 작품이 재현하고 있는 세계 등과 같은 구성소로 이뤄진 복합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연구는 이 각각의 구성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가가 어떤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어떤 교훈과 감동을 주는 것인지, 어떠한 언어적 기교로 이뤄진 구축물인지, 재현하고 있는 세계의 진상은 무엇이며, 어떠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고 있는지 등을 따진다. 즉, 전공으로서의 문학 공부는 작가와 작품, 작품에 반영된 사회상과 사회적 구조의 관계, 작품의 언어적 구조와 문체적 특징, 작품의 영향사 및 수용사 등을 연구하게 된다.
역사학은 인간의 삶을 현재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영위되는 단속적인 삶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전승과 계승의 삶으로 전제한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동시에 과거는 현재적 관점의 재해석과 재구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관계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도 일컫는다. 역사연구는 시기별로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등으로 구분되며, 지역별로는 한국사, 중국사, 영국사, 러시아사 등 국민국가 단위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분야별로는 정치사, 경제사, 사회·문화사 등으로 세분되고, 또한 다루는 범위에 따라서 미시사와 거시사로 나뉘기도 한다. 역사학 공부는 입문 단계에서 역사의 개념과 사관史觀, 곧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한 이해를 다진 뒤에 사료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철학은 인간이 사유하는 동물이자 이성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사유능력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해 주는 종차라면, 그러한 차이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는 것이 철학적 사유와 사변이기도 하다. 철학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든 경험, 신념, 사고에 대한 성찰, 비판적 반성, 논리적 분석 등을 시도함으로써 엄밀하고 깊이 있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을 지향한다. 철학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개념을 재검토하고 창안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철학 연구는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검토하고 재구성하면서,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사유와 저작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현실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영역을 구분하기는 했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 ‘언어’와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에 대한 지식과 성찰은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공부에 공통적인 지반이 된다. 때문에 학문적 인식에서 언어가 갖는 의미에 대한 반성은 인문학 공부의 바탕이다.
인문학의 가치와 역할
이탈리아의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인문학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앎이란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안다는 것이며, 사물을 만든 인간의 관점에서 인식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앎 혹은 지식이 인간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앎이나 지식이 ‘불확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인문주의가 갖는 ‘비극적 결함’이다. 인문학 공부는 텍스트를 만든 사람,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 및 지배권력 등을 꼼꼼히 따져가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인문학적 앎은 ‘부분적인 앎’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앎’, ‘전체적인 앎’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인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인문학 교육의 목표가 결코 잘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세계 속으로 독해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이러한 공적 역할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도 필요하다. 그것은 근대 인문학의 형성과정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근대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근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역사적으로 유럽이 전 세계 체제를 지배하던 특정 시점에 유럽의 문제,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이라는 다섯 나라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제 선택이나 이론화 방식, 방법론, 인식론 등에서 이 학문들은 그것이 태동했던 시대의 제약을 떠안게 되었다. 그러한 제약과 편견에서 탈피하기 위해 사이드는 교양교육의 주요 과목을 서구의 정전正典으로 제한하는 일, 세계를 이해하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태도, 제3세계의 전통과 언어에 대한 무관심 따위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레 요청되는 것은 인문학과 인문주의의 새로운 관심과 역할이다.
사이드가 새로운 인문주의와 함께 주창하는 것이 ‘민주적 비판’이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두 아랍어 단어에서 영감을 끌어낸다. 그것은 ‘무타카프muthaqqaf’와 ‘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thaqafa’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kifr’에서 각각 온 단어다. 즉, 아랍적 전통에서 지식인이란 ‘교양을 가진 인간’이면서 ‘사유하는 인간’이다. 오늘날 대학과 지식사회의 전문화가 낳은 부정적인 양상은 이러한 전통적 지식인상의 단절이다. 그것은 학계와 공적 영역의 분리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문학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과 ‘전공으로서의 인문학’으로 나뉠 수 있다고 했지만, 이 두 인문학의 관계는 개방적 소통의 관계여야 한다. 전문분야의 새로운 인문학적 탐구가 내실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대중적인 교양으로 체화되고 활용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지식의 최전선 탐색’과 ‘인문지식의 대중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인문학의 가치와 역할을 주장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인문학의 위기와 희망의 인문학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인문학의 즐거움이란 저서에서 커트 스펠마이어는 인문학의 ‘엘리트 프로페셔널리즘’을 비판한다. 사유의 핵심이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바꾸는 데 있다고 믿는 그는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교양’이 아닌 ‘과학’을 표방하면서, 그리고 ‘전문가를 위한 학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고립과 소외를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인문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함으로써 과학의 지위를 얻고자 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인문과학’이란 말 대신에 여전히 ‘인문학’이 통용되는 이유다.
전문적인 인문학의 고립과 소외는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관심과 지원 부족과 결부되어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낳았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 타개를 위한 방책으로 ‘최고경영자CEO인문학’, ‘노숙자인문학’이 새로운 인문학의 희망처럼 번져가고 있다. 노숙자인문학은 특히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강좌’, 곧 ‘희망의 인문학’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노숙자 외에도 교도소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재소자 인문학, 자활근로자와 지역주민을 위한 인문학 등 갈래는 다양하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 빈곤층이면서 인문학 소외계층에 속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한 끼의 끼니가 절실한 사람에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는 것이 소망인 사람에게도 인문학은 새로운 희망의 근거와 자존심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강좌는 보여준다.
흔히 인간의 욕구에는 위계가 있어서 생리적 욕구와 소속감, 자존심에 대한 욕구 등이 먼저 충족된 뒤에야 비로소 자아실현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도덕적인 삶과 문화적 향유는 경제적 성장 이후 생각해 보자는 ‘성장 이데올로기’가 기대는 것도 그런 단계론이다. ‘불만의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먼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연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욕구는 다른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기본적인 욕구 충족만을 관심대상으로 삼는 삶은 단순한 ‘생존’만을 지향하는 ‘벌거벗은 삶’이다. 그것은 재난적 상황 혹은 예외적 상황에서만 고려해 볼 수 있는 삶이다.
‘벌거벗은 삶’의 자리에서 인문학은 무의미한 사치이거나 장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삶이며 품위가 결여된 삶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한 러시아 병사의 운명을 다룬 소설에서 주인공은 과중한 노동량에 불평을 터뜨렸다가 즉결처분의 위기에 처한다. 독일군 장교는 사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독한 술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안주로 건네는데, 주인공은 단숨에 술을 들이켜지만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둘째 잔을 비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두 잔까지는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그래서 셋째 잔을 비우고 나서야 빵 한 조각을 조금 베어 물었다. 굶어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그 정도의 품위와 자존심은 지켰다. 그렇듯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참고문헌
박이문(2009), 통합의 인문학, 지와사랑.
에드워드 사이드(2008), 김정하 옮김, 저항의 인문학: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마티.
이현우(2009), 로쟈의 인문학서재, 산책자.
커트 스펠마이어(2008), 정연희 옮김, 인문학의 즐거움: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 휴먼앤북스.
한국학술협의회 편(2007), 인문정신과 인문학,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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