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수업과 생활, 멋지게 관리하기
자연과학,
울음원숭이의 식성을 연구하는 이유
이종호
두 명의 부부 생물학자가 코스타리카 북서부에서 30여 년 동안 나무를 매우 잘 타는 울음원숭이의 식성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해 거의 2주 동안 서로 다른 군의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하는 것을 보았다. 울음원숭이는 높이가 3미터 이상 되는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닐 만큼 좀처럼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런 원숭이들이 왜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진 것일까? 두 명의 생물학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계속 울음원숭이들을 관찰했다.
왜 그들이 울음원숭이의 식성을 30여 년이나 연구하고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그렇게 궁금해할까?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생물학자들의 연구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구가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안다.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므로 분명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두 생물학자의 연구 결론은 기후 변화로 인해 먹을 수 있는 잎들이 부족해지자 배가 고픈 원숭이들이 밀림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나뭇잎을 먹고 중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숭이의 식성을 30여 년씩이나 연구하는 것은 인간과 공통 조상을 갖고 있다는 영장류의 식성이 인간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대 밀림은 풍부한 먹을거리와 동시에 유해한 독이 가득한 식료품 저장실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유독한 화합물일지라도 소량으로 사용한다면 의학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아스피린, 퀴닌, 아트로핀, 모르핀, 디기톡신, 백혈병 치료제인 빈크리스틴과 같은 많은 의약품들도 식물의 독성을 이용하고 있다. 울음원숭이들의 식성 연구가 인간을 위한 신약 개발에 유용한 정보를 과학자들에게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인류 최초의 발명품은 ‘이쑤시개’
자연과학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물론,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은 언제부터 인간에게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창구가 되었을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관한 한 인류의 선조가 자신들이 생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려 잡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최초 발명품으로 ‘이쑤시개’를 거론한다.
180~200만 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은 초식동물이었다. 이 인류의 조상이 정확히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육식을 시작했는데, 짐승의 고기를 물어뜯기에 적당한 치아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 이 사이의 틈새를 디아스테마diastema라고 한다. 개는 위턱 맨 앞에 디아스테마가 있다. 그래서 아래 어금니와 앞니 사이를 위쪽으로 내밀 수 있다. 또한 동물들은 아래 어금니가 길게 비스듬히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위 어금니와 앞니 사이에는 일정한 틈이 생긴다. 이 틈새 때문에 먹이를 잡아먹을 때 결정적으로 필요한 어금니가 충분히 자랄 수 있고, 이 사이에 찌꺼기가 끼지도 않는다.
반면에 인간은 디아스테마가 없이 모든 이가 붙어 있다. 아직 불을 발견하지 못한 고대 인류가 음식물을 날로 먹고 찌꺼기가 이 사이에 끼었을 때, 매우 불편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 이쑤시개가 발명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 유럽과 아시아에 살았던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의 치아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쑤시개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학자들은 인간이 이쑤시개를 발명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에게 유익한 도구, 즉 인간이 보다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력이 이어져 결국 현대문명을 일구어낸 견인력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어떤 지식은 유용한 반면, 지식을 사용해 더욱 불편해지거나 고비용이 발생해 효용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100만 달러를 들여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만년필을 개발했다. 진공 상태에서는 지구의 만년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정거장에서 만난 구소련의 우주 비행사들에게 그 만년필을 자랑하며 그들은 어떤 필기도구를 쓰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때 소련의 우주 비행사들은 ‘연필을 쓴다’고 대답했다. 연필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과학의 소임은 이와 같이 인간이 얻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또는 사용할 필요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순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쓰임새를 결정하는 데에도 과학이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지식을 이용해 기술이 보다 개량되면 과거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게 되는 것처럼 미래의 실패를 예상해 연구 과제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현대과학은 과거의 불완전한 지식, 즉 오류로부터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오류가 아니더라도 당대에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한 물건이나 당연히 옳다고 생각한 이론이라 하더라도 후대의 새로운 지식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다. 인류가 계속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과학기술적 진보의 길을 가도록 이끄는 선지자, 즉 자연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자연과학의 토대를 놓기 시작한 현대 문명의 시원-엄밀한 의미에서 현대 과학 문명-을 이집트로 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과학적 사고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업적으로 간주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위대한 성취는 의심할 바 없이 ‘과학적 의식의 계발’이다. 그들은 삶 속에서 과학적 인식을 통해 보다 높은 삶을 영위하려고 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인간의 지능이 파악할 수 있는 질서로 보았고, 더불어 이론을 통해 과학을 추구함으로써 다소 긴 세월을 뛰어넘어 18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의 탐구와 연관을 맺는 근대기술의 토대를 닦았다고 설명된다.
고대 그리스(헬레네)의 과학은 다른 고대 문명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적 이론, 즉 ‘자연철학’이다. 우주에 관한 초기 그리스인들의 생각과 헬레네 시대의 다소 비실용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추상적인 지식 탐구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과학의 정의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다.
두 번째 특징은, 제도적인 지위에 관한 것이다. 헬레네 시대에는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어떤 명분으로든 국가적인 지원이 없었다. 고등교육이나 도서관, 혹은 관측소를 위한 공적인 지원도 없었고 과학자나 자연철학자들이 공직에 고용되는 일도 없었다. 몇몇 중요한 학파들이 출현했지만 그 학파들은 공적 교육기관보다는 사적인 모임이나 동아리에 가까웠다.
당대의 다른 전제적인 국가들과는 달리 헬레네 시대의 그리스에 과학을 위한 제도적인 기관도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 학자들에게는 장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의 학자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어느 누구에 의해 학문의 영역을 제약 받지 않고 자연세계에 관한 일련의 추상적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들 중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소유했거나 개인교사나 의사 또는 기술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고대 문명세계에서는 어떤 특출한 지식이라도 실용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져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철학과 사회적·경제적 목적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특출한 문명을 꽃피우는 데 기여했다. 플라톤은 자연에 관한 지식의 추구를 생산이나 기술 같은 하찮은 활동에서 분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연철학을 놀이나 유희, 또는 이성의 삶이나 철학적 성찰과 관련된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수행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헬레네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유형의 과학, ‘의도적인 이론적 자연 탐구’였다고 볼 수 있다.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의 과학기술적 업적은 후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준 지혜, 즉 여러 가지 수학적 사실과 실용적 기술들을 전해준 것에 국한된다.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도 피타고라스 정리, 즉 직각삼각형의 경우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와 b, 빗변의 길이를 c라고 했을 때 그것들 사이에 + = 의 관계(피타고라스 정리)가 성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런 관계가 성립하는지, 또는 어떻게 이 관계를 응용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이 관계가 정확한가, 아니면 근사적으로 성립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질문은 자연과학의 발달에서 매우 중요하다. 순전히 실용적인 면만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이집트의 경우 홍수에 의해 경계가 사라진 사방 100미터의 밭을 홍수가 지나간 뒤 99.5미터의 밭으로 찾아주었을 때 밭 주인은 큰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경우 0.5미터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중요성은 직각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각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수학적 지식이 현대와 같지 않은 과거에 직각, 즉 수직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공식을 이용해 나무 막대를 3:4:5의 비율로 만든다면 직각이 정확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내용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정리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수학적으로 명쾌하게 증명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수학이 건물을 짓는 등 실무 작업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피타고라스 이후 모든 산업에서 수학이 이용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것으로, 사실상 현대 과학은 피타고라스가 수학과 공학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스 학자들의 또 다른 업적은 이제까지 알려진 모든 지식에 대해 엄밀한 증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수학은 퍼즐로 된 고층건물과 같이 단 하나의 수학적 벽돌만 잘못되어도 전체가 무너지는 수직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체계 안에서 아주 미미한 오류라도 발견되면, 아무것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진술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직관이 비록 값진 길잡이이기는 하지만 증명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관적으로 당연하다’는 증명 과정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수학 등을 기초로 하는 자연과학이다.
이런 엄밀함을 요구하는 수학적 논지야말로 현대과학 이론을 탄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뉴턴 이론에 따르면 행성들은 완벽한 타원 궤도를 운행한다. 행성이 태양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지점을 근일점periheilon point이라고 부르는데, 만일 뉴턴 이론이 정확하다면 행성의 근일점은 매번 동일해야 한다. 그런데 1859년 르베리에Urbain J. Leverrier는 수성의 근일점이 100년에 38초만큼 이동함을 발견했다. 이 편차는 매우 작은 것이지만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편차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수성의 궤도를 계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수성의 근일점에 대한 편차의 원인을 설명했다. 그 편차는 아주 작은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뉴턴에 의해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의 몰락을 요구했다.
미지의 분야 탐구가 과학
과학으로 거론할 수 있는 분야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수학, 물리 등 기초학문을 포함해 이과적인 실험을 거친 순수 이학 분야를 의미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공계의 범위가 넓어져 과연 이것도 이과 분야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영역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학과 물리를 기초로 한다.
둘째는, 어느 분야든 적용되는 규범과 틀이 과학적인 체계에서 움직이는 경우다. 사회과학, 인문과학은 물론 정치과학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분야에서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를 수학과 실험을 통해서 규명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도 과학적인 규범과 틀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셋째는, 인간과 관련된 분야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희로애락을 느낀다. 이는 인간이 가진 특권의 하나다. 이 특권을 보다 값지게 만들거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 자체를 과학으로 보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종종 형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한다. 형사들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 정황을 그려보며 피살자가 어떻게 살해되었는가를 검증한다. 다음에는 범인이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파악한 뒤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정한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자료만으로 범인을 찾을 수 없다면 추리를 통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이론, 즉 가설을 세운다.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범인은 누구일까?’ 범행 당시를 설명하는 가정을 올바로 세우면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건 정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면 오히려 범인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빠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기 쉽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대부분 미지의 분야다. 그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적절한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이 쌓이자 학자들은 지구가 둥글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떤 학자가 대담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지구가 정말 둥글다면 누구든 같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때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그들의 예측대로 용감한 항해가들이 먼 항해를 했고 결국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와 같이, 진보를 위한 과학에서 또 다른 기본 요건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이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 나아가 파격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창의성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 즉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창의성은 보편타당한 의미와 가치 안에서 그것을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만드는 재구성도 포함한다.
과학의 발전을 추구하는 견인차로 볼 수 있는 창의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을 통해 형성된 고정관념으로 기존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새 세상, 즉 새 지식에 맞는 창의적인 이해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고정관념에 얽매이면 과학의 발전이 이뤄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고정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개인은 물론 사회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성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잘못하면 괴상해진다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것, 예전 어디에도 없던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분야에서나 그로테스크하며 해괴하고 난해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창의성이란 완전히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새롭게 창작한다는 것에 많은 비중을 둬야 한다. 실제로 과학이 아닌 철학, 신학 등의 분야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사상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거의가 원래 있던 것에서 파생되거나 또는 몰랐던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시대의 변화에 따른 표현의 발전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의 중세인들을 속박하던 엄격한 기독교 사상이 십자군 전쟁은 물론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점차 인간적인 사고와 지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미래
과학이 발달할수록 미지의 과학에 대한 최종 책임은 과학자에게도 묻게 된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소재이지만, 세계를 장악하려는 일부 독재자나 과학자가 항생제에 저항성이 있는 미생물, 독소를 생산하거나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 또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무기나 로봇을 개발하는 등 극한의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탁월한 아이디어지만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SF영화나 작품에서 이미 많이 다룬 소재다. 문제는 인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독재자나 과학자를 어떻게 견제하느냐가 관건이다. 사실 과학자로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거나 신기술을 발명하는 것처럼 매력을 느끼는 일은 없다. 과학자로서 남이 하지 않은 분야를 개척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이 아이디어나 개발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의 안목이 성숙해서 적어도 인간에게 결정적인 파국을 만들어낼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까?
바로 이 대목에서 자연과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우리 모두가 어려운 양자론이나 통일장 이론을 숙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사람들의 인식이 성숙하면 이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의 오남용으로 인한 결정적인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어떠한 획기적인 기술 발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일반 사람들이 자연과학의 기본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수많은 오류들이 과학적인 사고에 의해 수정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과학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과거에나 오늘날에나 과학은 인간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
자연과학의 또 다른 중요성은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논리적인 방법론이 인간이 당면하는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데 있다. 시대가 흐를수록 과학이 발달하고 요구되는 문제들이 계속 바뀌지만 이것 역시 자연과학에서 풀어가는 방법론을 사용하면 위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어떤 방법론보다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기술문명도 인간의 엄청난 가능성을 볼 때 아직 기초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