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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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새로운 것'에 대한 문제의식
이택광
예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그림이나 조각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음악이나 춤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나 문학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이처럼 예술은 다양한 장르의 총합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을 과학이나 철학과 구분해 주는 특징은 있다. 바로 감각과 감정에 호소하는 ‘미학적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이 실증과 논리에 충실하다면, 예술은 반대로 정서와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인간의 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서 창조라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문제다. 새로운 것은 감각적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느낀’ 다음에 ‘이해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든다기보다도 주어진 것에서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것이다. 예술은 원시시대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지만, 예술에 대한 이론은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터전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이 대표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노릇이지만, 플라톤은 왜 이런 ‘망발’을 했을까?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
모방, 문제의식의 출발점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으로 보았다. 모방이라는 것은 원본과 사본이라는 전제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술에 대한 최초의 문제설정을 플라톤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모방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고대철학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예술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그냥 멋대로 자기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했던 시학과 철학에서 벌어졌던 모방을 둘러싼 논쟁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리스의 시학과 철학에서 모방을 산발적으로 거론하긴 했지만, 플라톤처럼 모방을 모든 예술철학의 토대로 설정한 경우는 없었다. 플라톤은 모방을 중심으로 심리와 현실성의 문제라는 기본적 논의구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은 ‘예술적 모방’과 ‘철학적 모방’을 구분해서, 예술보다 철학이 훨씬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모방을 재현re-presentation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이라는 말이다. 재현이라는 것은 ‘다시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다시 보여주는 것일까? 원본을 다시 보여주는 것, 말하자면 ‘사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술은 철학보다 더 원본에서 멀어진 모방이기 때문에 질이 떨어지는 사본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요지다. 플라톤은 예술과 철학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중적 관계로 보았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분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을 나쁜 모방으로 보았던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 호머를 비판하면서 필연적인 재현의 오류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만일 호머가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가장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와 서사는 재현 따위에 붙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가장하지 않았다면’ 호머의 시는 ‘좋은’ 모방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가장하지 않고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모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른 인물인 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서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드라마 같은 것은 나쁜 모방이고 과학 논문 같은 것은 좋은 모방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이 옳다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모방자’는 초월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진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남을 속이지도 않고, 언어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방자는 특출한 능력을 발휘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고리타분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나 이론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재현의 이중구조는 여전히 예술학에서 중요한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모방의 이중성이다. 쉽게 말하자면, 플라톤은 예술의 재현과 사물을 분리시켜서 언제나 사물이 재현보다 먼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예술학의 핵심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플라톤이 근본적인 의심을 예술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모방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의심 말이다. 따라서 아무리 진실하고, 신념에 찬 좋은 모방이라고 할지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사유행위나 그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진실성의 훼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얼마나 모방이 사물과 닮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바꿔 물을 수 있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과 재현 사이의 유사성 또는 동등성이었다.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의견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문제가 있다. 비슷하거나 똑같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허위이고 가장이기 때문이다. 재현은 결코 사물과 똑같아질 수 없다. 재현은 끊임없이 사물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기획을 예술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학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재현’과 ‘모방’이라는 최초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예술의 재현을 가상이라고 생각하고 속임수라고 보았지만, 이런 생각은 플라톤의 시절에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플라톤은 참으로 능수능란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놓고 재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재현과 철학적 재현을 구분하는 수법이 그렇다. 재현 자체를 예술적인 것과 동격에 놓았다고 한다면, 플라톤은 자신의 이야기도 하나의 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예술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플라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의 문제는 ‘가상의 가장성’이라는 속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은 가장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예술의 재현보다 훨씬 더 사물의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플라톤이 예술을 이렇게 파악한 까닭은 당시 예술이라는 말에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말에 얽힌 의미들도 시대별로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영어로 예술을 뜻하는 ‘art’라는 말은 라틴어 ‘ars’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 말은 ‘배열arrangement’이라는 뜻이었다. 여러 개를 함께 묶거나 끼워 맞춘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기술’을 뜻하게 되면서 현재 의미로 바뀌었다. 단순하게 예술을 정의하자면, ‘여러 가지 사물이나 재료에 기술을 가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기존에 존재하는 감각을 되풀이해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다.
낭만주의의 반전
낭만주의는 산업사회의 출현과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지적 운동이었다. 특히, 자연을 과학적 합리주의에 맞춰 재단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의 영향은 광범위했는데, 시각예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감정에 근거한 미학적 경험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낭만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가 바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다.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 Labarthe와 장-뤽 낭시Jean-Luc Nancy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진술한 낭만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낭만주의와 칸트의 철학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철학은… 낭만주의를 지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고 거칠게 번역한다면, 이것은 칸트가 낭만주의의 가능성을 개막했다는 것을 뜻한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선배는 없었다. 특히 19세기에 일관되게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수립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낭만주의로 가는 ‘통로’가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참신하고 예견할 수 없었던 철학과 미학의 관계가 칸트에서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칸트에서 이 관계는 단순히 ‘관계에 놓인다’는 말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하나의 가교가 놓여야만 하는 심연이 열리고, 비록 몇몇 연결점들이 없진 않다고 해도-예를 들어, 예술과 철학이라는 관계-단절, 또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서 면제라는 역설적 형상 속에서 나타난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의 이념’은 단절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들은 지적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낭만주의 이전에 활기를 띠었던 고전주의라는 것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취향으로 돌아가자는 예술운동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낭만주의는 새로운 예술의 규범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주의의 핵심은 과학적 합리주의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고전주의는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정의된다. 이런 고전주의 미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기법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전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은 고대에서 검증받은 ‘좋은 모방’을 그대로 현재에 되풀이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에 비한다면, 낭만주의는 얼마나 새로운 예술을 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있다. 낭만주의가 새로운 것을 예술의 전통에 도입하는 방식은 ‘천재’라는 범주를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천재는 전통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다. 말하자면, 특이성singularity을 체현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으뜸 예술가인 것이다. 천재는 그냥 예술가라기보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서 보편화시키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낡은 전통에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에 역사 속에서 연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단절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낭만주의 예술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비평’의 임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이런 낭만주의 비평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비평의 임무는 예술이라는 반성의 매개에서 앎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성의 매개에서 대상의 지식을 위해 일반적으로 운용되는 법칙이 바로 예술비평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술작품과 대면하는 순간 비평은 자연적인 대상을 직면한 관찰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단지 대상에 따라 달라질 뿐, 동일한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이 예술작품에 대한 앎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앎self-knowledge이다. 비평이 예술작품을 판단할 때, 이것은 자기판단self-judgement에서 발생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낭만주의 비평은 과학과 유사하지만,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비평정신은 궁극적으로 비평 행위를 자연물에 대한 관찰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상정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은 비평이 만들어내는 앎이라는 것이 자연과학의 관찰과 달리 ‘자기앎’이나 ‘자기판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앎이나 자기판단이라는 것은 어떤 외부적 준거를 갖지 않는 자기완결적이고 절대적인 앎과 판단을 의미한다. 이 앎과 판단이야말로 낭만주의 비평이 말하는 ‘총체성’이다. 이 총체성의 구현자가 천재인 셈이다. 낭만주의 비평에서 핵심적인 것은 취미 판단에 의한 특정 작품에 대한 주관적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비평의 객관성은 ‘역사적 타당성validity’을 통해 이뤄진다.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명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단테와 보카치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역사적 평가를 통해 타당한 판단이 내려진 작품들이다. 여기에서 역사적 타당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역사적으로 공인되는 것을 뜻한다. 이 공인되는 과정은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체로 공동체에서 그렇다고 인정한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관점들을 제공한다. 칸트가 만들고 낭만주의 예술이 도입한 ‘천재’라는 존재는 예술가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일 것이다. 창백한 얼굴을 가진 병약한 예술가의 모습은 신체의 아픔을 곧 세계의 질병으로 파악했던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반영하고 있다. 천재와 예술을 연결하는 발상은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시인-예술가야말로 공동체의 규범에 반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합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설정했던 플라톤의 입장과 다소 다른 생각인 셈이다.
예술가적 주체, 또는 현대예술의 비밀병기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로 낭만주의 예술의 관점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낭만주의에 와서 예술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이 ‘아름다움美’으로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새로운 것은 익숙한 것과 결별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익숙한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의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런 합의를 깨뜨려버린다. 대표적으로 인상파나 입체파를 생각해 보자. 흥미롭게도 인상파나 입체파를 지칭하는 명칭들 자체가 ‘조롱’에서 유래한 것이다. 19세기 파리의 관람객들은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19세기에 그림이라는 것은 라파엘로의 그림처럼 매끈하고 명확해야 했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흐름과 떨림을 표현하기 위해 윤곽을 흐리고 거칠게 그렸다. 이런 표현기법과 사실적 소재들이 관람객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심지어 관람객들은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미완성작을 전시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예술가가 대중과 대립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 더 심해진다. 20세기 예술은 더 이상 즐거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이 갈라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현상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방가르드’로 자리매김한 새로운 예술의 정체성을 여기에서 확인 가능하다.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감각체제에서 다른 감각체제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또한 아방가르드에서 앎과 감각이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예술은 낭만주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는 것은 ‘어떻게 예술을 통해 새로운 앎을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낭만주의에서 절대시했던 천재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는 절대적이고 독창적인 개인이었지만, 현대예술은 이런 범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을 생각해 보자.
제목만 들어봐도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뒤샹은 본인의 사인만을 첨부한 변기를 눕혀 놓고 <샘>이라는 고전적인 제목을 붙여서 전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 넣는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뒤샹이 개구쟁이라서 이렇게 했을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뒤샹의 의도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작품으로 구현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예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미술관 같은 시공간의 규정을 통해 탄생하는 앎의 문제’라는 사실을 뒤샹은 폭로하고자 했다.
변기라는 ‘공산품’은 과거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작품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뒤샹이라는 ‘예술가’의 사인을 첨가해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갖다 놓음으로써 갑자기 ‘예술’로서 타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뒤샹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낭만주의 예술을 지탱하고 있는 ‘천재’나 ‘독창성’이라는 개념이다. 현대예술에 오면 그나마 예술가라는 범주에 남아 있던 낭만주의의 천재 개념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팝아트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술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출몰했다. 팝아트는 현대예술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앤디 워홀 같은 작가가 대표적이다. 워홀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코카콜라 한 병에 같은 값을 지불하고 사먹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화폐가치의 ‘평등한’ 교환성을 자신의 예술 원리로 삼았다. 워홀은 이를 통해 대중문화 시대의 예술이 어떻게 존속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줬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워홀은 통조림통이나 세재상자를 모방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더 이상 예술이 자연의 모방으로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사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좋은 예술이라는 플라톤주의적인 믿음은 여기에서 붕괴한다. 낭만주의 예술만 해도 자연은 언제나 예술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차원이었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이런 구도 자체를 부정한다. 왜 그럴까? 쉽게 말하면, 현대예술은 ‘예술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을 주요 임무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구현하고, 자기 자신의 비밀에 몰두해서 그것을 해명하는 작업에서 ‘예술의 자유’를 발견하는 특징이 현대예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팝아트처럼 예술의 정체성을 해체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아무리 해체를 해도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체제’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미학의 체제가 없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워홀도 자신의 작품에서 사인본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했듯이,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부정하더라도 예술이라는 행위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예술가-천재’라는 범주다. 엄연히 말하면, 칸트가 말한 천재는 공동체의 윤리와 다른 미학의 차원을 구현하고 있는 주체다. 공동체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의한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주체를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진리의 주체’라고 부른다. 이런 진리의 주체야말로 예술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근거인 것이다. 팝아트에서는 미학의 체제가 중요한 것이라기보다, 이 체제를 위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 ‘예술가적 주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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