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1부 전공과 교양, 신나게 공부하기
교양과 전공,
지식의 융합을 향하여
진중권
대학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대학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은 원래 ‘선생과 학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표현 ‘univer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인 ‘칼리지college’는 ‘동업자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라틴어 ‘collegium’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통 몇 개의 분과만으로 이뤄진 단과대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특정한 대학에 속해 있을 수도 있고, 대학의 외부에 독립적인 교육기관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진 대학제도는 물론 비교적 최근에 서구에서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최고 교육기관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지에서 서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대학의 역사
예를 들어, 중국에는 아득한 우순(虞舜, B.C. 2257~B. C. 2208) 시절에 이미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상상上庠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이는 후에 국학國學이라는 이름의 국립대학으로 발전한다. 하왕조(B.C. 1989~B.C. 1558) 때에는 성균成均, 한나라(B.C. 206~A.D. 220) 때에는 태학太學, 수나라(581~618)와 청나라(1644~1912)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는 이름의 최고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이 중국의 교육제도는 훗날 한반도에까지 전해져, 고구려의 태학(372), 신라의 국학(682), 고려의 국자감(992?), 고려와 조선시대의 성균관(1308)을 낳게 된다. 특히 ‘태학’은 종종 ‘대학’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곤 했는데,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서구 대학제도를 받아들일 때 ‘university’의 역어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탁실라라는 곳에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힌두교와 불교를 연구하는 기관이 있었다고 한다. 팔라왕조 때 설립된 날란다대학교(450)는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꼽히며, 그보다 몇 백 년 뒤에 등장한 비크라마실라대학교(800년경)와 더불어 인도에서 불교 연구의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다. 페르시아에는 사산왕조 시기에 의학, 철학, 신학과 과학을 연구하는 ‘준디샤푸르 아카데미’가 존재했는데, 6~7세기경에 특히 의학 연구의 중심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아랍 문명에도 모로코 페스의 ‘알카라위인대학교’(859), 이집트 카이로의 ‘알아즈하르대학교’(975)가 존재했는데, 이 두 대학교는 세계에서 제일 먼저 학위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아랍의 대학에서는 의학은 물론이고 신학, 철학, 문법, 이슬람법,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구에서 대학의 기원은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아’(B.C. 387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아카데미는 오늘날의 대학과 달리 일반 대중에게 닫혀 있는 연구자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선생과 학생의 구별도 없었고, 확립된 커리큘럼 없이 플라톤이 던지는 물음을 학자들이 공동으로 대답하는 식으로 연구가 이뤄졌다고 한다. 아카데미아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대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는 전설에 비춰볼 때, 교과과정 안에 수학이나 기하학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대화편”에 묘사된 장면으로 미뤄볼 때 대화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변증론이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거기서 그는 19년 동안 공부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오늘날의 ‘아카데미’가 의미하는 것처럼)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학자들의 모임인 ‘학술원’에 가까웠다. 대학을 최고 교육기관으로 볼 경우 서구에서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만한 것을 꼽자면,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설립한 ‘콘스탄티노폴리스대학’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설립 당시(425)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대학도 아카데미아와 같은 학자들의 모임에 가까웠고, 8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잔틴 제국에서 ‘대학’으로 공인을 받는다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정신활동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대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철학, 법학, 수사학, 의학, 산술, 기하, 천문, 수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과를 연구했다. 주로 국가와 교회를 운영할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대학을 중세 최초의 ‘세속적’ 대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말에 이르면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대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1088), 훗날 소르본으로 알려질 파리대학교(1150년경),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1167)와 케임브리지대학교(1109) 등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특히 이 대학들은 서구에서 최초로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학사BA: Bachelor of Arts, 석사MA: Master of Arts, 박사Ph.D : Doctor of Philosophy와 같은 학위제도는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유럽 대학의 ‘박사’ 학위는 물론 이슬람 문명에서 들여온 것이다. 아랍의 대학에서 박사는 원래 ‘법률적 견해를 가르치거나 제기할 수 있는 자격증ijazat attadris wa’l-iftta’을 의미했다. 아랍의 대학에서 박사는 이렇게 법학에 한정된 자격증이었으나, 유럽의 대학들은 이를 다른 분야로까지 확장시켰다. 서유럽에서 최초로 박사학위가 수여된 것은 1150년 파리대학교에서의 일이었다. 철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전공자들에게까지 ‘철학 박사Ph.D’를 수여하는 것이 좀 의아하게 여겨질 것이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고대와 중세의 전통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당시에 ‘철학’이라는 말은 오늘날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늘날에야 철학은 그저 여러 학문 중 하나일 뿐이지만, 중세 때만 해도 그것은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이름이었다. 오늘날 철학이 아닌 다른 분과를 전공한 이들에게까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19세기까지만 해도 박사학위는 여전히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에만 존재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분과에까지 널리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독일 대학의 전통으로, 오늘날에는 모든 대학에서 이 독일식 관습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유교양
과거에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전통적인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유학예artes liberalis’다. ‘자유’라는 표현은 원래 예속된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시민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즉, 노예의 노동이 실용적 목적을 가진 신체적 활동이라면, 자유시민의 활동은 순수한 교양을 목적으로 한 정신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교양’이란 고대 사회에서 자유시민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정신적 소양이다. 5세기경에 활동했던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Minneus Felix Capella는 자유학예에 속하는 과목으로 일곱 가지를 꼽았다.
문법, 변증론,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이 그것이다. 카펠라가 세운 이 7학예의 체계는-변증론만 논리학으로 바뀔 뿐-중세 문화 속에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중세인들은 카펠라에게서 받아들인 7학예를 다시 둘로 쪼개 ‘세 과목’이라는 뜻의 트리비움Trivium과 ‘네 과목’이라는 뜻의 콰드리비움Qudrivium으로 구분했다. 트리비움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으로, 오늘날의 문과에 해당한다. 콰드리비움은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으로, 오늘날의 이과에 해당한다. 7학예 속에 음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텐데, 중세의 7학예 속의 음악은 오늘날의 음악학에 가까운 개념이었고, 피타고라스 이래로 서구에서 음악은 수학과 근친관계에 있었다. 한편, 실제로 음악을 만들거나 연주하는 것은 당시에 저급한 장인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중세 말에 그려진 어느 그림이 보여주듯이 7학예는 종종 신들의 모습으로 의인화되곤 했다. 7학예에 둘러싸여 가운데에 왕좌에 앉은 것은 바로 지의 사랑, 철학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대학에는 문리대文理大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문과인 트리비움과 이과인 콰드리비움을 합친 것으로, 그 이름은 아련하게나마 중세 이래로 내려오는 자유학예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유학예야말로 예로부터 대학이라는 제도의 본령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자유학예는 실용성을 따지지 않는 순수인문학과 순수이학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직업적, 기술적, 장인적 성격의 커리큘럼과 구별되어 왔다. 그 때문에 과거에는 오늘날의 공대, 미대, 음대는 대학university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의 전문대학 혹은 단과대학에 가까운 칼리지college 혹은 호흐슐레hochschule에 속해 있었다. 독일의 경우 공대는 1970년대 이후, 음대와 미대는 불과 몇 년 전부터 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유교양의 관념은 오랫동안 고대의 철학적 전통과 중세의 신학적 전통에 묶여 있었다. 그 때문에 직업적, 기술적, 예술적 커리큘럼을 가르치는 공대나 미대가 오랫동안 대학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의 지식인들은 실용적 직업행위를 노예의 노동으로 보아 천시했고, 중세의 지식인들은 신학적 이유에서 세속적 활동이나 지식을 경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관조theoria’, 즉 순수한 정신의 눈으로 영원불변하는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지식이 급속히 세속화하면서 초월적 진리를 바라보는 ‘관조’는 세속적인 진리를 생산하는 ‘이론theory’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지식의 산실은 수도원에서 대학으로 옮겨졌다가, 거기서 다시 장인의 작업장과 기업의 연구소로 넘어가게 된다. 세속화 과정 속에서 ‘지식’은 더 이상 영원불변한 이데아 세계를 보는 것이나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상품의 생산과 제작을 위한 ‘노하우’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에 일어난 이 변화도 대학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대학은 여전히 정신적 교양으로서 순수학문에 정진하고, 장인과 기업은 생산을 위한 실용적 지식에 몰두하면서 둘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상태가 오랫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과학과 기술이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산업혁명조차도 과학자가 아니라 기술자들의 작품이었다. 산업과 학문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1950년대 과학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과학 없는 기술’, ‘과학 없는 산업’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세태의 변화는 당연히 대학을 크게 변모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나 LG와 같은 기업은 자체 내에 수만 명의 박사급 연구원을 거느리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연구와 개발을 주도하거나 경제나 경영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은 주로 이들의 몫이다. 이렇게 지식의 생산이 기업과 정부의 연구소에서 이뤄지면서, 대학의 학부는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력을 제공하는 곳(‘맞춤형 인재’), 대학원은 기업에 연구원을 공급하는 곳, 대학의 실험실은 기업에서 발주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곳(‘산학협동’)으로 여겨진다. 지식 생산의 주도권이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지식의 실용성이 강조되고, 이로써 한때 대학의 본령으로 여겨지던 자유학예는 빛을 잃게 된다. 요즘 주위에서 흔히 듣는 ‘인문학의 위기’, ‘순수과학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된 현상이다.
보편인에서 전문가로
중세 말에 설립된 최초의 대학들은 상당히 수준이 높았던 모양이다. 당시에 자유학예는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입학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고 하니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대학이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회적 엘리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대학은 대중을 위한 교육기관이 되었다.(한국의 경우, 심지어 고졸자의 87%가 대학에 입학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학의 커리큘럼은 일반적으로 교양과정과 전공과정으로 나뉜다. 초기에는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과목들을 두루 공부한 다음에 세분화한 분과를 공부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올라가면 일반적으로 연구의 범위는 더 좁아진다. 모든 분야에 통달한 ‘전인homo universale’에 도달하는 것이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이상이었다.
가령, 탁월한 예술가이면서도 다양한 과학에 통달하고 발명에까지 능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르네상스 이상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다빈치는 가능하지 않다. 근대의 산업이 분업을 통해 발전한 것처럼, 근대의 지식의 발전도 주로 정신적 분업을 통해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다빈치가 살던 당시와 달리 오늘날 예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낳은 사람이 동시에 물리학 연구에서도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만 하더라도 철학자이면서 태양계 생성에 관한 가설(칸트-라플라스 가설)을 세울 수 있었지만, 오늘날 철학자가 물리학의 영역에 들어와 양자역학의 가설을 내세운다면 아마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17세기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르네상스 전인의 이상은 무너지고 특정 분야의 매우 세분화한 주제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지식인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거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expert, specialist’로 간주된다. 이 전문화의 추세는 물론 자연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연구가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하고 깊숙해지는 데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전문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학문은 같은 분야를 전공하는 몇몇 사람들만 이해하는 언어로 자기들만이 관심이 있는 주제를 연구하는 고독한 작업이 되었다.
반면, 보편적 교양은 사회는 물론 대학에서조차 쓸 데 없는 잡식雜識, 혹은 생활에 불필요한 장식품 정도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오늘날 지식의 전 영역은 세밀한 주제를 다루는 촘촘한 칸막이의 방들로 나눠진다. 전문가들은 자기만의 골방에서, 때로는 바로 옆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직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한다.(언젠가 우연히 만난 역사학 교수는 같은 과의 동료 교수하고도 소통의 문제를 겪는다고 하소연했다. 둘 다 조선 후기를 전공한다 해도, 풍속사 전공자와 왕조사 전공자는 만나면 서로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인접 분야를 이해하는 데에도 엄청난 양의 축적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부분적 작업이 전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세계관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세계관을 세우는 데에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의 총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전문화에서 비롯된 지식의 위기에 대한 반성은 이미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과학소설 저술가 C. P. 스노우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행한 <두 개의 문화> 라는 강연에서 교육개혁을 통해 과학적 문화와 문학적 문화 사이의 간극을 극복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이 몰락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대학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며, 영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미국이나 소련의 대학처럼 튼튼한 교양교육을 바탕으로 전공교육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강연은 1950년대에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전공 위주의 대학제도를 바꿔놓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최근 ‘통섭consilience’이라는 프로젝트와 더불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학문의 횡단과 융합, 스페럴리스트
최근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은 자연과학, 인문과학 및 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서로 협력해 지식의 본질인 통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식의 대통합, 즉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있어야만 21세기의 새로운 지식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섭의 필요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지식의 발전은 그 동안 전문화를 통해 이뤄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전공으로 세분화할수록 당연히 통합의 필요성 역시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에 지식의 통합이 강조되는 데에는 당연히 물질적 근거가 있다. 즉, 전공을 세분화하는 전문가 제도가 산업혁명의 분업적 노동에 조응한다면, 각각의 전공들을 다시 통합하는 새로운 보편인 제도는 정보혁명의 통합적 노동에 조응한다. 산업혁명의 시대에 지식의 생산이 ‘분석analyze’을 통해 이뤄졌다면, 정보혁명의 시대에 지식의 생산은 그저 분석만 하는 단계를 넘어 분석된 정보를 ‘합성synthesize’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산업혁명이 아날로그적이었다면, 정보혁명은 디지털의 특성을 지닌다.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아날로그 매체들 사이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다면, 디지털은 모든 것을 0과 1로 환원시키는 가운데 매체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린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컴퓨터로 글을 쓰고, 편지를 보내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보고, 영화를 보며, 방송을 시청한다. 이른바 ‘융합convergence’은 디지털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다.
문화의 영역에서도 장르 간 크로스오버는 오늘날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융합은 이미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령, 특정한 형태를 갖추려는 DNA의 특성을 이용해 나노 입자를 조립할 때, 생명공학과 재료공학은 하나가 된다. 로봇의 제작에는 기계공학이나 전자공학만 필요한 게 아니다. 로봇에 인간적 면모를 부여하는 데에는 인지과학의 연구가 필요하고, 로봇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데에는 디자인 감각이 요구된다.
컴퓨터 게임을 개발하는 데에는 줄거리를 짜는 문학적 서사능력, 배경과 캐릭터의 이미지를 만드는 예술적 감각, 그리고 상호작용의 옵션을 실현하는 엔지니어링이 요구된다. 이처럼 정보혁명과 기술혁명의 시대에 대학은 특정한 분야에 갇힌 전문가만이 아니라, 분과 간 횡단과 융합에 능숙한 ‘새로운 부류의 인간new breed of people’을 양성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이미 제도적 실험의 단계에 이르렀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는 ‘자유전공학부’를 설치했다. 그것의 목표는 아마도 르네상스의 ‘보편인generalist’과 근대의 ‘전문인specialist’을 결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보편인과 전문인을 결합한 이른바 ‘스페럴리스트speralist’는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분야와 넓게 접속할 줄 아는, 이른바 ‘T자형’ 인간이다. 동물에도 어느 환경에나 적응하는 보편적 종omnivores과 특수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 특수한 종herbivores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도 보편인과 전문인이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양자를 결합한 제3의 종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미래의 생산은 점점 더 예술가와 인문학자와 기술자의 삼각 컨소시엄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예술가가 이미지를 상상하면, 인문학자는 거기에 해석을 제공하고, 엔지니어는 그것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는 방식, 이것이 미래의 주요한 생산형태가 될 것이다. 이미 예술적 창의성이 없는 기술, 혹은 문학적 서사가 결여된 기술은 한갓 기능으로 전락하고 있다.
미래의 공학자는 어느 정도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한다. 나아가, 기술적 수단으로 제작되는 ‘기술형상techno-image’의 시대에 예술가는 기술을 이해해야 하며, 사회적 소통이 주로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뤄지는 시대에 인문학자는 새로운 매체의 예술과 기술을 이해해야 한다. 보편적 교양에서 전문적 지식으로, 거기서 다시 지식들의 통합으로. 이 역사적 경향은 장기적으로 대학에서 교양과 전공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도 변화시킬 것이다. 미래에도 물론 전문가와 전문적 지식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분과를 넘나드는 횡단과 접속과 융합의 능력, 즉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다른 분야와 결합시켜 하이브리드를 창조하는 능력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학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영문도 모르는 채 산업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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