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사랑과 인생, 열렬히 빠져들기
사랑과 우정,
불안한 청춘에서 불온한 청춘으로!
고미숙
사랑처럼 흔한 말도 없고, 우정처럼 낯선 말도 없다. 입만 열면 사랑의 소중함을 떠들어대고, 사방에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쳐대지만, 정작 사랑의 가치를 믿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그렇기는커녕 다들 한탄해 마지않는다. ‘사랑 없는 비애’를, ‘사랑할 이가 없는 비애’를. 그런가 하면 ‘우정’이란 낱말은 홀연 증발해 버렸다. 우정 혹은 의리, 이 낱말을 평소에 입에 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으리라. 이대로라면 이 말들은 이제 사전에서나 존재하는 사어死語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범람해서 싸구려가 되어버린 ‘사랑’, 변경으로 밀려나 망실되어 버린 ‘우정’. 이게 우리 시대 사랑과 우정의 현주소다. 하여, 우리 시대 청춘들은 불행하다. 사랑과 우정이 없는 청춘, 그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아니, 청춘에 대한 모독이다. 사랑과 우정이 없다면, 대체 무엇으로 청춘의 저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현한단 말인가!
‘불안’과 ‘불온’ 사이
청춘은 봄이다. 동양 우주론의 토대인 음양오행론에 따르면 봄은 목木의 기운이 왕성한 시절이다. 목이란 말 그대로 나무의 기운이다. 봄이 오면 나무는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 겨우내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응축되었던 씨앗이 얼어붙은 지층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낡은 대지를 갈아엎는 생명의 경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주론적으로 말하면, 목극토[木剋土 : 목이 토를 극한다(이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청춘이 인생의 봄에 해당한다면, 대학생들은 바로 이 목의 기운, 대지를 갈아엎는 전복적 의지로 충만해야 한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겉모양은 아주 멀끔하다. 내가 청춘을 통과한 세대와 비교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인종 개량’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허나, 그럼 뭘 하는가? 속은 다 곯았는데. 한꺼풀만 까뒤집으면 청춘이라고 하기 뭣할 정도로 나약하고 흐물흐물한 속살이 바로 드러난다. 이건 나의 자의적 독단이나 편견의 소산이 결코 아니다. 수많은 20대들과 만나면서 현장에서 확인한 바다. 무엇보다 20대들 스스로가 그렇다고 인정한다. 대체 왜 그렇게 약하고 소심하냐고 물으면, 그들은 말한다. ‘불안하다’고. 불안해서 그렇다고. 대체 뭐가? 사랑도 인생도 미래도 그냥 온통 다 불안하다고. 사실 뚜렷한 실체는 없다. 하긴 그렇다. 불안이란 본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영혼 전체를 잠식해 버리기 때문이다. 청춘의 불안, 불안한 청춘!
헌데, 이게 참 희한한 노릇이다. 지금 20대는 역사상 유래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자란 세대다. 특히 부모의 자상한 배려를 원 없이 받고 성장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거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1980년대, 그 엄혹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대학생들은 ‘거침없이 하이킥!’ 하는 자세로 폼 잡고 다녔는데. 그 시절엔 정치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그 이전에 억수로 가난했다. 지방 유학생들은 거의 슬럼가 같은 곳에서 자취나 하숙을 했고, 하루에 토큰(버스표) 하나로 버티면서 선배나 동료들 ‘삥 뜯어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대학생의 패션? 장발과 청바지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듯 뻐기고 다녔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를 휩쓴 변혁의 열기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습과 제도에 대한 거센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 이후 20여 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다. 실제로 그 사이,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사실들에 견줘본다면, 요즘의 대학생들은 어느 세대보다도 청춘의 자유와 열정을 누려야 마땅하다. 헌데, 그렇기는커녕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니.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지층을 뚫고 나오는 나무들의 치열함은커녕 늦가을 한 줄기 바람에도 스러질 듯 아스라하다. 농담 삼아 말하면, ‘몸은 20대, 마음은 70대’라고나 할까. 대체 이런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아주 익숙한 진단법이 있긴 하다. IMF, 청년실업, 경제공황, 비정규직 등등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청춘이 나약하고 불안하다면 그건 참, 말도 안 된다. 가장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세대가 경제적 이유로 청춘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일찍이 그 정도의 문제가 없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전에는 더 많은 사회적 장벽이 청년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춘은 ‘불온한 열정’으로 들끓을 수 있었다. 기성의 제도와 관습을 거스르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때 청춘은 더할 나위 없이 불온해진다. ‘불안’과 ‘불온’, 둘은 한끝 차이지만, 내용은 천지 차이다. 불안한 청춘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나약함을 표현한다면, 불온한 청춘은 하나의 시대를 창조해 낸다.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저 푸르른 나무들처럼.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불안에서 불온으로, 청춘의 ‘포스’는 마땅히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의 열정 또한 마음껏 불사를 수 있다.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랑과 연애 역시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우리 시대의 사랑과 연애는 더할 나위 없이 궁핍하다. 그런데 그 궁핍의 결정적 이유는 사랑의 전 과정이 ‘화폐’에 의해 몰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청춘의 내면이 불안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삶을 지배하는 척도가 오직 경제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가 이토록 허약해진 것이다. 예컨대, 우리 시대의 사랑과 연애는 한마디로 ‘상품’이다. 커피전문점이나 레스토랑에서 차나 술을 마시고, 쇼핑몰과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그리고 모텔에서 섹스를 하고. 22데이, 발렌타인데이, 무슨무슨 데이 기념을 하고. 커플룩을 입고, 커플링을 주고받고. 요컨대 모든 것이 화폐로 교환된다.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행위는 사랑의 표현에서 배제된다. 쇼핑으로 시작해서 쇼핑으로 끝나는 사랑. 이걸 사랑이라고 이름해도 좋을까? 그러니 입만 열면 사랑을 떠들어대지만 실제론 다들 사랑의 부재 때문에 괴로워한다. ‘사랑합니다!’ 하고 자신 있게 외쳐대는 건 연인 사이가 아니라, 은행, 카드회사, 백화점 등이다. ‘사랑합니다!’ 뒤에 오는 가장 일반적인 말은 ‘고객님!’이 되지 않았는가. 오, 끔찍하여라!
그 결과, 우리 시대 사랑의 패턴은 크게 양극단을 오가게 되었다. 한편에는 포르노적 쾌락, 다른 한편에는 멜로의 순정이 있다. 둘의 공통점은 사랑을 소유, 그것도 ‘화폐적 소유’와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포르노적 성애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거기서는 성욕이 곧 소유와 등가화되어 있다. ‘나에게 쾌락을 주는 만큼 나는 그를 욕망한다!’는 식으로. 그런가 하면 순정과 배신으로 이어지는 멜로적 연애 또한 다르지 않다. 멜로에서 사랑은 순수로, 그 순수는 영원한 소유와 오버랩된다. 그래서 그것이 훼손될 경우, 처절한 배신과 복수로 이어진다. 사랑의 순수와 영원함을 강조하면서 실제론 증오의 처절함으로 범벅이 되고, 마침내 죽음을 향한 질주를 마다않는다. 멜로드라마에 불치병 환자나 교통사고, 기억상실증 같은 끔찍한 소재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결과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게 우리 시대가 설파하는 사랑의 일반적 문법이다. 이것을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인다면, 대학생들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다. 우리 시대의 청춘이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즉, 미디어가 쏘아대는 사랑의 명제들을 그대로 따라가자니 숨이 차고, 따르지 않자니 뭔가 허전하고. 늘 연애를 하고 있는데도 사랑에 목마르고, 언제나 연애를 갈구하면서도 정작 사랑이라는 사건이 시작될라치면 달아나고 싶어지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아마도 ‘쿨한’ 연애일 것이다. 절대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가지 않고 적당히 즐기다 깔끔하게 헤어지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관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열정을 하향평준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청춘의 열기를 얼어붙게 만든다는 점에서 몸에 아주 해롭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주 간단하다. 에로스의 원초적 의미에 충실하면 된다. ‘에로스’란 예기치 않은 사건을 불러오는 역동적인 힘이요, 에너지다. 생의 길목에서 느닷없이 휘몰아치는 폭풍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 이런 사건과 마주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지배하는 기성의 질서와 싸워야 한다. 춘향이가 신분제라는 시대적 억압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던 것처럼. 우리 시대라면 그 대상은 ‘화폐권력’이다. 즉, 사랑을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나를 지배하는 화폐적 욕망과 싸워야 한다. 상품화된 욕망의 틀 안에서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면, 아직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화폐화된 욕망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나로 하여금, 나의 연인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인도하는 것, 사랑은 모름지기 그런 것이어야 한다.
대하소설 ?임꺽정?에는 조선시대 민중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다 10대 안팎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이들은 모두 천민이자 도망자들이지만, 사랑과 성(性)을 박탈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유분방하게 누린다. 이들이 펼쳐내는 사랑의 서사는 하나하나가 다 ‘블록버스터’다. 어떤 권위, 습속, 예교도 이들의 에로스적 분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들의 사랑은 중간단계가 없다. 머뭇거림, 잔머리, 확인 절차 따위가 없다. 그냥 몸으로 들이댄다. 몸과 몸이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것, 그것이 조선시대 민중들의 사랑법이다. 온갖 잔머리에 매뉴얼까지 동원해서 줄다리기를 하지만 정작 사랑이 시작된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우리 시대의 연애와는 얼마나 다른지.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자신이 있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던져져야 하는 물음 역시 바로 이것이 아닐지.
친구는 ‘제2의 나’다!
<여고괴담>이란 영화가 있다. 10년이 넘게 고등학교를 떠나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는 여고생 귀신에 관한 이야기다. 대체 뭣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학교를 죽어서까지 계속 다니고 있는 거지? 학교가 너무 좋아서? 1등 한 번 해보려고? 그게 아니라,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친구를 기다리느라 그랬단다. 한마디로 친구가 없어 ‘한이 맺힌’ 귀신이었던 거다. 그렇다. 친구가 없으면 정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친구가 필요해! 나만의 소중한 친구가 있다면.’ 누구나 이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친구와 인생을 함께하는 찐한 우정을 나누고 싶으냐고 하면, 다들 뜨악해한다. ‘웬 우정? 그건 좀 부담스럽지 않나? 꼭 그렇게 깊은 우정을 나눠야 하나? 쿨하게 적당한 거리에서 사귀는 게 좋지 않을까?’ 심심할 때 만나서 다른 사람들 뒷담화 하고, 아니면 취토록 마시면서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로해 마지않는 것. 지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친구와 우정의 범위는 이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다의 파트너, 아니면 회식의 동반자.
그래서 참 어이없다. 친구를 그렇게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면서 만날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하니 말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건 내가 마음을 여는 만큼 인연의 장이 생기는 법이다. 친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대체 친구가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간단 말인가? 그러므로 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면 된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18세기의 대표적 문인 이덕무李德懋의 아포리즘이다. 친구에 관한 글 가운데 이보다 더 사무치는 표현도 드물 것이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좀 심한 거 아니냐 싶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연애가 특별한 감정으로 ‘공인된’ 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다. 도시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이 개인으로 파편화되면서 이른바 ‘내면’이니 ‘자의식’이니 하는 기제들이 특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오직 연애만이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는 표상의 전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아울러, 우정을 비롯한 다른 종류의 윤리적 관계들은 모두 이 연애의 주변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전의 시대에 우정은 절대 연애의 보완물이 아니었다. <삼국지>나 <열국지> 등에 나오듯,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숱한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충이나 효 같은 도덕적 정언명령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적 테제’였다. 가장 드높은 파토스를 수반하는 공명과 촉발의 기제, 그것이 우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덕무의 저 다소 ‘닭살스런’ 수사가 절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한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라고. 함께 보고, 함께 듣고, 함께 맛보고, 냄새까지 함께 맡는다. 그리고 마침내 지혜와 깨달음까지 함께 나눈다. 그게 친구라는 거다. 요컨대, 친구란 도덕이나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을 함께 구성해 가는 동반자를 의미한다.
‘우정의 경제학’, 청년실업의 대안?
이덕무나 연암 박지원만이 아니다.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 등 동서고금의 철학자, 그것도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이들에게 우정이란 윤리적 잠언이나 그럴싸한 레토릭이 결코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차원에서, 다시 말해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치를 의미한다. 우정의 윤리가 경제학적으로 변주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할 때의 경험이다. ‘친구가 많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열 명쯤 손을 든다. ‘그 친구가 가족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반쯤 손을 내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친구를 위해서도 내가 가진 재산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자, 그런 친구를 가진 사람?’ 한 명 빼고 다 손을 내린다. 이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친구하고는 돈거래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친구하고 돈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정말 아끼는 친구라면 더더욱. 아무리 소중한 친구라도 부를 증식하는 데 돈을 보태줘서는 안 된다. 그건 투자 활동이지 우정의 교감이 아니다. 하지만 꼭 필요해서 빌려줄 때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한다. 설령, 이 돈을 다 잃는다 해도 어떠한 회한이나 미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게 ‘우정의 경제학’의 기초다. 물론 이건 출발에 불과하다. 이걸 발판으로 삼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번 따져보자. 왜 돈은 가족, 그것도 핵가족의 범위 안에서만 돌고 도는가? 명품을 사서 장롱에 내팽개쳐 둘지언정 친척을 위해서는 한두 푼도 아까워한다. 주식이나 펀드로 돈을 날리는 건 있을 수 있어도 사촌의 병원비로 돈을 쓰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물며 친구한테서랴.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친구를 위해 돈 한 푼을 편하게 못 쓴다면 그건 친구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걸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엔 돈이 성욕보다 더 내밀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친구란 무엇인가? 인생을 함께 가는 동반자다. 연암의 말대로 친구가 없다면 대체 인생의 희로애락을 누구와 더불어 나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서로 소통해야 한다. 돈이야말로 소통을 위한 도구다. 예컨대, 친구 중에 먼저 정규직을 얻는다거나 아니면 알바를 해서 돈을 번다면,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가 매우 힘든 처지라면 그 친구를 위해 돈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가족끼리는 서로 용돈을 주고받는데, 친구끼리는 그게 왜 안 되는가? 의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까짓 돈정도야 뭐. 물론 받는 친구 역시 그냥 받아선 안 된다. 주는 친구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 책을 열심히 읽어서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든지, 혹은 노동으로 지친 친구에게 건강의 노하우를 알려준다든지. 그래야 주고받음에 분별망상, 채무감이 자리 잡지 않는다.
경제가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많은 부분은 돈이 핵가족 내부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돈은 물과 공기와 같다. 물과 공기가 어떤 격자 안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온통 질식하고 말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출구를 터서 매끄럽게 흐르게만 해도 세상은 한층 넉넉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정의 경제학’이야말로 청년실업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솔직히 한국경제의 상황을 보건대, 청년실업은 당분간 해소될 전망이 없다. 그렇다고 서로 악다구니를 쓰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청춘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오, 노! 오히려 이런 경제적 패닉상황을 새로운 출구로 삼아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유포한, 삶을 오직 화폐적 경쟁으로 환원했던 공식을 타파하고 자유의 공간을 열어젖히는 출구로. 그중 하나가 친구들끼리 경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다. 친구와 경제, 이런 말을 들으면 다들 동업을 하거나 벤처기업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다. 투자와 증식을 위해서만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서로 연대해야 한다. 제도에 의존하지 말고, 진정 우정의 힘으로 서로 경제적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으리라.
나는 많은 동료들과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연구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우리 연구실은 소위 ‘밥상공동체’다. 연구자들이 밥과 생활을 같이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렇게 꼭 밥을 같이 먹어야 하나? 번거롭게스리.’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연구실의 20대들은 한 달에 40~50만 원 정도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절대 궁핍하지 않다. 경제적 수치로는 빈민층이지만, 생활의 실제 내용은 고액연봉자 못지않게 풍요롭다. 더 중요한 건 이렇게 하다 보면 생활비 역시 연구실 안에서 벌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거다. 공동체란 공부와 경제가 하나로 일치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우정의 경제학’의 진정한 비전이다.
청춘이여, 욕망하라!
대학이란 젊음과 청춘이란 말로 상징되는 곳이다. 무엇보다 친구와의 만남이 어디보다 빈번한 곳이고, 사랑이란 강렬한 만남이 어디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친구 없는 대학시절이나 사랑 없는 대학시절이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청춘’이 언제 어디서보다 가깝게 접근하고 결합되는 장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엔 대학에서조차 이 셋이 다 각개격파당하고 있다. 모조리 화폐권력에 의해 포획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화폐권력과 대결하면서 이 셋을 하나로 결합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던져진 화두다. 대학생이 되는 순간, 모두 이 화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너무 절망적이라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이 화두를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온해질 수 있다. 다시, 불안한 청춘에서 불온한 청춘으로! 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 지배와 예속의 도구로서의 지식이 아닌, 존재와 우주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서의 공부를. 그때 비로소 대학은 취업을 위한 예비학교가 아니라, 청춘의 열정이 눈부시게 분출되는 전위적 배움터가 될 것이다. 고로, 청춘이여, 욕망하라! 사랑과 우정의 불온한 향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