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봉사와축제, 뜨겁게 만끽하기
동아리,
자유롭게 사는 방법
조원광
자유! 대학에 막 들어온 이들을 이보다 더 설레게 하는 단어가 있을까? 이제 지각했다고 운동장을 돌아야 할 일도, 모의고사 성적이 내려갔다고 타박받을 일도 없다. 하루 24시간을 빼곡히 매웠던 시간표도 없고, 매 시간 나의 행동을 감시하는 학생부 선생님도 없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자유로운가? 최소 12년간의 학교생활 끝에 얻은 황금 같은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는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PC방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런저런 핑계로 얻은 용돈을 손에 쥔 채 쇼핑을 위해 거리를 헤맬 수도 있겠다. 미래에 대비해 어학학원에 등록해서 고교 시절을 연장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많은 이들이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어리둥절하고 있으리라.
이런 건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언젠가는 PC방에서, 길거리에서 돌아와야 한다. 돈이 없는 사람을 환영해 줄 PC방과 백화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는, 몸은 고교 시절보다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어느 때보다 불안할 것이다. 무엇을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당신은 결국에는 남들 사는 대로 살게 되어 있다. 가만히 있는다고 삶의 대책이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걸 굳이 ‘자유’라고 부르겠다면 말릴 수야 없다. 하지만 철학자 니체라면, 그런 사람을 보고 자신을 얽어맨 쇠사슬에 너무 익숙해져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러고서 자유롭다 외치는 둔감한 노예의 형상을 발견할 것이다.
자유는 능력이다
자유는 특정 나이를 넘어서거나 기관에 소속된다고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나이 들어 대학에 입학했다고 자동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군가가 스스로 삶을 꾸릴 때, 우리는 그를 보고 ‘자유롭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독립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목표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안목이다. 안목과 능력이 있다면, 설령 나이가 어릴지라도 그는 자유롭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비록 그의 나이 열여덟에 불과했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반면 그런 능력이 없다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자유롭지 못하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부모의 판단에 기대어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고등학생의 삶을 살아가는 셈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나이를 먹고서도 고등학생의 삶을 살아간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비슷비슷한 삶을 택하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때가 되면 취직을 하고, 야근과 잔업 마다않고 일하다가, 역시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자식은 나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온갖 사교육을 동원한다. 사람들이 이런 익숙한 삶의 궤도를 밟아가는 것은 그것이 삶의 보편적이고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 아니다. 가족과 노동을 중심으로 삶이 짜인 것은 기껏해야 250년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엄청난 행복을 보장하기 때문도 아니다. 행복하다면 왜 직장에서 한창 활동하는 40대가 스트레스로 돌연사하고,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겠는가? 정확히 말해, 그것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행복인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 다양하다. 각자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잠재되어 있다. 적극적으로 발견해 계발하지 않으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좋다고 말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능력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은,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입시 공부를 해왔던 이제까지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유롭고 싶다면, 상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고, 그것을 관철시킬 실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갈고 닦는 이는 많지 않다. 삶의 자유는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쟁취해야 할 능력이다.
능력을 발견하는 방법, 동아리
동아리는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고 키우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일차적으로는 ‘취향’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취향이라면, 생각보다 우리는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싫어하는 건 잔뜩 있다. 이제껏 나를 괴롭혀왔던 교육 제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밉다. 예쁘고 잘생기면 최고인 외모지상주의가 싫고, 하루 종일 일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회사에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교육제도가 싫다면 어떻게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외모지상주의가 싫으면 어떤 미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힘들다. 우리는 통상 싫어하는 건 많지만 좋아하는 건 별로 없는 이상한 상태에 처해 있다.
자신의 취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제로 구성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교육 제도가 싫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교육을 작은 범위에서나마 실현해야 한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자체 커리큘럼을 가진다면, 그들은 대학 수업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가진다. 현재의 예술이 싫다면, 그것과 다른 예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미적 감각에 기초한 예술을 시도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는 기존의 예술에서 자유롭다. 만약 무언가를 싫어하는 단계에만 머무른다면 어딘가에 저항하고 반항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조직하는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명확해야 한다.
동아리는 이런 취향을 발견하고 훈련하는 과정이다. 취향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것이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면 즐거울지’ 알 수 없다. 특히, 그것이 현재의 감각이 아니라 ‘잠재된 능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동아리를 통해 내 취향,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실험해 봐야 한다. 누구도 동아리 활동을 간섭하지 않기에 자유롭게 여러 시도를 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죽어라 운동을 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보는 독특한 시선을 익힐 수도 있고, 고전에 있는 옛 성현들의 지혜를 통해 내 생활을 고민해 볼 수도 있다. 누가 알아주거나 상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삶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과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그런 중에 전에는 몰랐던, ‘나를 정말 뜨겁게 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두려움 없이 그 길로 나아가보자. 갑자기 조각에 ‘필’이 꽂혔다면 한번 죽도록 해보자. 공대생이지만 인문학이 너무 재미있다면 스스로 세미나 팀을 조직해 열심히 공부해 보자. 프로가 되어 먹고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러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일만 했는데도 생계까지 ‘풍요롭게’ 해결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줄이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늘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바를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함’과 기꺼이 거기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그것에서 정말 큰 열정과 행복을 찾는다면 예상 외로 쉽게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속에서 이미 행복과 삶의 보람을 얻은 이에게 큰돈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고? 이제 겨우 20대다.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60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 남들의 진도와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빠름에 안도하고 뒤쳐졌음에 열등감을 느끼며 살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당대의 미적 감각을 통째로 바꿔버린 빈센트 반 고흐는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설사 많이 늦었다 한들,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오래 살아도 늘 병원을 들락거려야 하는 인생은 그리 즐겁지 않다.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누군가가 시키는 것만 하는 인생은 노예의 인생에 다름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삶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등감을 덮고도 남으리라.
능력을 키우는 방법, 우정
혹자는 꼭 동아리여야 하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을 발견하는 것은 혼자 전공 공부를 하거나 많은 책을 보면서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나만의 삶을 꾸리고 자유로워지는 데에 타인은 불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 재능과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나가는 일에 동아리는 필수적이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실험해야 한다. 개개인은 생각보다 미약하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익숙한 일만 하고 익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익숙한 일과 시선이란 자신의 고유한 취향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여론과 분위기의 결과물일 확률이 크다. 거의 모든 10대 남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모습에서, 거의 모든 20대 여성이 멜로물을 좋아하는 모습에서 익숙한 일이란 내 고유한 취향과 거리가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고유한 재능과 삶을 개척하는 일은 익숙한 집단적 논리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일과 경험에 나를 노출시켜야 한다. 그럴 때 집단의 여론과 외부의 욕망에 가려진 나의 모습을 하나씩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혼자서 할 수 없다. ‘익숙하지 않음’이란 지금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한 무언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동아리와 친구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동아리에서 친구와 만날 때 비로소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영화를 봐도 나와 다른 느낌을 가진 친구의 감상을 들어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게 고유하다 착각하는 집단의 감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책을 읽을 때 혼자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친구와 토론해 봐야 한다. 그때 내가 가진 편견이 드러나고 문제를 발견하며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혼자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와 다른 삶을 꾸리는 이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이제껏 생각지 못했던 삶의 비전을 떠올릴 수 있다. 내 고유한 능력과 재능은 그런 과정에서 발굴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재능과 능력을 발견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이미 내게 익숙하게 자리 잡은 집단의 욕망은 마치 중력처럼 나를 계속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발견한 재능과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남다른 재능만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제껏 자신만의 삶과 세계를 가졌던 이들은 자기가 가진 재능을 누구보다 성실히 갈고 닦았던 사람들이다. 천재 화가라 여겨지는 반 고흐는 영감으로 갑자기 작품을 쏟아낸 것이 아니라, 데생과 유명 작가의 그림을 베끼는 연습을 수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가수 비가 오늘날 월드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하다 할 만큼 열정적인 연습 때문이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누구도 이런 수련을 혼자서 할 수 없다. 아무런 자극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익숙하고 편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를 극복하는 것 역시 친구를 통해 가능하다. 동료는 내 능력을 발견하도록 해줌과 동시에 그것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다. 친구는 내가 익숙한 상태로 돌아가려 할 때 호통치고, 고유한 관점을 좀 더 날카롭게 벼리도록 자극한다. 나와 다르지만 나와 함께하는 사람만이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동료이자 때로는 스승인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친구나 동료와의 우정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우정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것이다. 사실 우리네 우정은 쉽게 서로의 허물을 감싸고 각자의 추함과 약점을 망각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친구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놈이 나쁜 놈이야.’ ‘넌 잘못한 것 없어.’ 흔히 주고받는 이런 말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왜소함을 잊게 된다. 대신 똑같이 ‘찌질한’ 동료를 보고 자신의 왜소함을 위로하고 만족한다.
이런 식의 관계는 자유로워지기 위한 우리의 기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우정은 차라리 전쟁이며, 사랑은 오히려 경멸’이라 지적한다. 나의 목 끝에 창을 겨눌 수 있는 자가 바로 친구이며,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거든 지금 그의 왜소한 모습을 기꺼이 경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동아리가 바로 이런 우정과 사랑의 장이 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비로소 우리의 삶과 능력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분명 많은 충돌을 낳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돌은 각자가 자신의 껍질과 습을 깨고 나가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나와 다른 이와 만나 함께함으로써 무수한 자극을 끊임없이 주고받을 때,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강해질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평생을 살아가는 방법
언젠가는 모두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갈 것이다. 그러면 아마 대학시절의 동아리는 그만두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아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미 깔려 있는 레일 위를 허겁지겁 달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가족이나 직장이 요구하는 일들을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인생을 따르지 않는다면, 삶이란 결국 동료를 만들고 그와 함께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사회는 학교보다 훨씬 더 거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료가 필요하다.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자극하며 동료와 함께 우리 삶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거창하게 가족을 부수고 직장을 때려치우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직업을 가지고 그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이웃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고민과 시도를 위해 반드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동아리란 차라리 ‘평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대학시절의 동아리는 이런 적극적 삶의 시작이며, 이를 연습하는 훈련의 과정이다. 동아리를 통해 나와 이질적인 친구와 함께하고 그것을 능력으로 삼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동아리 하듯 평생을 살아갈 때,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곳에 이르고,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한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