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봉사와축제, 뜨겁게 만끽하기
출제,
일상을 벗어나는 힘의 난장
오선민
<난타>(1999), <도깨비 스톰>(2001), 그리고<점프>(2005)와 같은 한국 공연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새로운 공연 예술의 흐름을 이끌 수 있었던 계기는 영국의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한 축제 때문이었다. 매년 8월이면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은 음악, 연극, 영화, 도서, 심지어 군대 문신Military Tatoo의 향연장이 된다. 투우와 소몰이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페르민 축제, 기독교적 억압에 대한 해방구로서 열정적인 삼바 춤 퍼레이드를 펼치는 브라질의 리오 축제, 그리고 한국의 남원 춘향제 등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 축제들은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에든버러는 매번 낯선 예술 공연과 전시에만 집중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세계인들을 초대한다. 이 축제는 외지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곳에서는 예술에서 가장 낯선 것들이 무대 위에 오른다. 그 어떤 대의나 명분도 예술적 의도나 관람의 목적을 탈취해 갈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열리기 시작한 이 축제의 취지는 ‘인간의 영혼이 꽃필 수 있는 바탕provide a platform for the flowering of the human spirit’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축제를 제일 먼저 일으킨 사람은 비엔나 태생의 루돌프 빙Rudolf Bing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영국에 건너와서 슬픔과 향수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 전의 오스트리아 등에서 열리던 축제들을 떠올렸다. 1947년에 에든버러 시의 관계자들을 겨우 설득해서 음악과 예술의 축제를 기획했지만 처음에는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고 참혹했던 전쟁 이후,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은 축제 소식에 곧바로 뜨겁게 타올랐다.
축제의 기획도 외지인이 시작했지만, 첫 회 공연을 가장 멋지게 장식한 것도 베를린 출신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였다. 그는 빈 필하모니,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들, 영국과 프랑스의 교향악단과 실내악단 등 전 유럽에 흩어져 있는 연주자들을 모두 모아 대축제를 열었다. 전쟁의 화기가 채 가시지 않은 유럽, 스코틀랜드의 작은 지방에서는 이해 준비한 공연 티켓의 95퍼센트가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도시로 갑자기 몰려든 외지인들을 위해 작은 마을의 시민들은 낯선 이들에게는 철저히 폐쇄적이었던 자신의 집 대문을 열고 처음으로 외국의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폐허 위에서 시작된 축제는 매년 성공을 거듭해 나갔다. 여기에는 관습을 뛰어넘으려는 또 다른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에든버러는 처음부터 특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축제가 처음 시작될 때 8개 공연팀이 공식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을 참을 수 없었던 그 팀들은 자신만의 축제인 ‘공식적 연극 행사의 변방the fringe of the official festival drama’을 따로 열었다. 여기에서 유래된 축제의 이름이 ‘프린지’ 축제다. 프린지란 변두리, 외곽을 뜻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허용하며, 그 어떤 것도 실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이란 ‘변두리’와 ‘외곽’에서 싹튼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에든버러 축제를 점령한 것은 사실상 바로 이 프린지 축제다. 그 어떤 심사도 검열도 할 수 없는, 역사적 권위나 통념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낯선 실험으로서만 입장권을 획득할 수 있는 도전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에든버러 축제는 특정한 장르의 문법을 무색하게 하는 예술의 모습들을 드러내려는 세계인들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예술적인 것을 과잉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 다국적 참가자들과 관광객들이 오고 간다고 해서 국제적인 예술 축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 자체의 힘을 증폭시키면서 국경이라는 경계 자체를 의심할 수 있게 할 때, 세계인의 축제가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축제에 들어가는 방법: 광인에서 구경꾼으로
축제는 일상의 규칙과 사회의 약속들을 먹어치우면서 그것들을 변형하고 파괴한다. 서양 축제의 대표적인 기원으로 언급되는 ‘카니발carnival’도 사순절이라는 고기를 먹지 않는 기독교의 금욕기간 직전에 마지막으로 질펀하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카니발이란 ‘살덩이를 걷어낸다’는 뜻으로, 고기를 전부 먹어치우겠다는 말이다. 이 기간에는 지주와 농노, 사제와 민중, 겨울과 봄, 죽음과 삶, 미친 사람과 정상인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면서 섞여버린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고, 이웃의 사생활도 아무렇게나 폭로한다. 함부로 물건을 던지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성의 없이 옷을 입고, 친하지 않던 사람과 갑자기 키스를 한다. 이 극단의 현장은 절도 있게 진행되던 생활의 리듬, 활동의 터전들이 갖는 의미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카니발이 정식화되기 시작한 서양 중세에서는 사람들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라는 것은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늘 광장, 술집, 교회, 길거리의 공공장소에서 이웃과 함께 어울렸다. 서로 함께 있으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어두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월 말에서 2월 말까지 벌어지는 카니발 때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탱했던 광장과 교회가 바로 축제의 장소가 된다. 생활의 일상적 리듬을 완전히 파괴할 때, 신과 영주가 명령했던 모든 법들이 뭉개질 때, 거인이나 광인과 같은 기이한 인물이 축제의 주인공이 된다. 엄청나게 큰 것과 부담스럽게 과잉된 것들이 넘쳐난다. 웃음과 식사, 배설과 신체 훼손은 지주와 농노 모두를 바보로 만들면서 함께 떠들게 했다.
중세 농촌의 축제에서 광인은 필수적인 존재였다. 초록색은 이런 사회에서 광기의 상징이기도 했다. 광인 역할은 실제 미친 사람이나 다소 어눌한 사람이 맡기도 했지만, 도시의 상류층 명사들도 광인협회 회원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광인은 축제의 분위기를 선동하기도 했지만, 군주의 입성식과 같은 근엄한 예식에도 등장해 분위기를 중화시키면서 군중의 조롱 욕구를 만족시키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인을 무서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불쌍해하면서도 혐오하고 조롱했다. 그러면서도 흉내 냈다. 축제의 순간에는 누구나 미칠 수 있었다. 두 귀 모양의 후드가 달린 의복과 끝에 여성의 두상과 방울이 달린 지팡이는 광인 중의 광인, 즉 광인의 왕이 입는 복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중세 사회의 카니발은 그 모습을 바꾸게 된다. 14세기와 17세기 사이에는 광인 자체가 점차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했다. 카니발에서는 여전히 각광받았지만 더 이상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고, 퍼레이드의 장식물로 전락해 갔다. 시골이나 도시 모두 카니발을 통해 공동체의 일체감과 화합을 성취하려고는 했지만, 도시에서는 자연의 풍요로움이나 다산에 대한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았고 죽음이나 신을 초대하던 마술적인 감성도 별로 매력을 끌지 못했다. 대신, 도시의 카니발은 점차 도시인들 사이의 위계를 강조하고 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도시 전체의 번영을 희망하는 선전의 무대, 도시 질서의 규범을 강조하는 의식적인 몸짓은 화려하고 과시적인 퍼레이드를 몇 차례 돌리는 형태로 카니발의 관행을 바꿔버렸다. 시골에서는 동물 가면과 투박한 변장이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도시에서는 군중을 압도할 만한 거인 인형, 엄청나게 차려입은 군주나 재력가의 등장을 통해 현실을 압도하는 스펙터클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뒹굴고 뭉쳐 다녔던 축제의 모습이 시청과 부호의 집을 거치는 대규모 퍼레이드로 바뀌고, 축제의 참가자를 화려한 볼거리의 단순한 관람자로 수동화시키고 만 뒤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집단적 의례나 한철의 소비거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축제에서 광인이기를 자처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단순한 구경꾼에 만족하게 되었다.
혁명은 축제를 닮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축제는 자신이 파괴할 것과 파괴할 수 없는 것을 가리지 않고 길, 운동장, 광장 등에서 사람들을 뒤섞어놓는 일이었다. 의사소통이 무한히 확장되면서 순간적으로 나이와 성별, 계급과 직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축제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경계를 넘어선 만남이 가능했다. 축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화려한 행렬, 푸짐한 음식과 함께 일상의 관례화된 리듬을 뒤집으며 이방인들에게, 죽은 자에게, 그리고 당연히 신에게도 모든 것을 허락했다. 심지어 그 고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도 그 기간에는 미친 짓을 하면서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누구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지위로부터 평등해진다. 학연과 지연, 국적과 나이를 떠나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쉽게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축제 때 발생하는 평등한 우정과 친밀한 동질감은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곤 했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 하나의 국가, 지역의 전통에 기반한 대부분의 축제는 이렇게 공유된 감정을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회수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축제가 만들어준 즐거운 혼돈이 단 하나의 목적, 단일한 집합체를 위한 과시의 장으로 전락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1790년 7월 18일 바스티유 함락을 기념하는 공식 연맹제가 끝나자 파리 곳곳에서는 자유롭고 비공식적인 거리 축제가 일어났었다. 사람들은 이념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구 떠들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다양한 모임들, 떠들썩한 연설장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과감하게 말하는 무대로서의 축제였다. 고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문하면서 모인 모두가 정치에 대해 원시적인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군인과 시민이 뒤섞여서 웃고 떠들었던 이 축제는 곧바로 이념적인 것으로 바뀌어 정치적 선동과 선언들을 공표하는 무대로 고착화된다. 자유로운 연설 속에서 웃고 감탄하던 시간들은 혁명의 수습 이후에 ‘국민’의 이름으로서 곧바로 해석되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축제 동안 재평가되었던 계급과 성, 정치와 사회에 대한 질문의 힘은 희석되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거리에서는 삶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과 질문의 무대가 열리곤 했다. 단상과 사회자 없이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먹고 사는 일에 대해, 학교나 회사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었다. 배움의 정도에 관계없이, 출신 지역과 지적 능력에 관계없이 우리가 왜 모여 있으며,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거침없이 질문했다. 사람들은 질문과 답이 오고가는 시간 안에서 각자가 처한 삶의 문제들을 세상에 내놓았고, 서로의 삶에 간섭했다. 학교나 회사, 군대라는 제도가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었지만, 서로가 처한 삶의 질곡을 말하고 들으면서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거침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발언하고 누군가에게 답을 요구했던 그 시간은 나이, 성, 직업, 계층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웃고 떠들었던 축제의 순간이었다.
대학 축제는 놀이가 아니다!
대학에서 보내는 한철은 우리 일생에서는 축제와 같은 시간이다. 때로는 전공과 무관하게도 수업을 듣고 취미나 사소한 즐거움을 위해서도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다.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사람을 만나고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향해 온갖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이 모든 것이 한계 없이 가능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사회가 보유한 낡은 가치들에 대해 질문하면서 거침없이 토론하고, 그 누구와도 우정을 나누면서 자신을 변신시키기에 여념이 없어야 한다. 대학 축제는 그러므로 축제의 축제이다. 평범한 시민이나 귀족과 고위 정치가조차 광인으로 변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중세의 축제처럼, 우리는 축제 기간에 대학생활에서 당연했던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면서 학문과 배움 그 자체를 낯설게 만들 수도 있다.
축제는 놀이와 구별되어야 한다. 놀이는 규칙을 수용하는 것이며 특정한 행동을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시켜서 과장된 스펙터클로 만든다. 여기서는 참가자와 관람자 모두 동일한 규칙의 반복 속에서 극대화된 긴장감을 맛보게 된다.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규칙이라는 것 자체를 파괴한다. 그럼으로써 문화와 같은 질서나 생활 규범이 없는 순간의 공포스러운 세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일상 속의 축제를 표방하면서 도심 한가운데에 세워지는 놀이공원이나 연례적으로 과거를 회고하는 국경일, 전문가의 장기자랑 대회와 같은 것들은 축제가 될 수 없다.
대학 생활에서 익숙해진 패턴, 지켜야 할 원칙들 너머를 꿈꾸고 싶다면 매년 봄 총학생회에 기대어 관례화된 이벤트가 벌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멋진 연예인이 와서 뛰어난 장기 자랑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전공과 학년, 취미와 성격에 관계없이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면, 배움과 대학 생활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 수 없다면, 화려한 대학 잔치도 결국 한낮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 축제는 결코 피곤한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다. 번쩍이는 구경거리와 질펀한 먹을거리 속에서 일상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는 것은 축제에 참가하는 방법이 아니다. 대학생으로서의 나를 되돌아보고, 대학의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방식의 삶마저도 꿈꿔보자. 우리는 광인마저도 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