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문화와 교양, 넘치게 쌓아가기
사회 이슈,
언론의 사실을 넘어 현장의 진실로
신경민
사람은 대개 생래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 호기심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자 학문과 소식을 좇는 기초가 됐다. 이 기초를 토대로 ‘인쇄술’이라는 과학의 결과와 ‘근대’라는 시대가 결합해 ‘신문’이라는 언론매체가 등장했다. 신문은 새 소식을 대중에게 전파하면서 권력과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확산하고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현대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역시 민주주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국가 간 또는 지역 간 차이를 보이지만, 이 언론매체들은 독재 체제와 싸우는 역할을 했다.(물론 반대로 독재와 영합해 거짓과 편견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 인간이 뉴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현실을 분석할 만큼 지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뜻한다. 가족 또는 부족 수준의 가까운 지인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각종 집단은 물론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와 우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뉴스와 언론을 통해 여러 다른 시각과 평가를 접하면서 다양성과 유연성, 사회성을 익히는 계기가 된다.
인문·사회과학도는 언론을 통해 ‘살아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동시에,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는 학문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학문적 설명의 진부와 적합도를 확인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심취했던 이론이나 독트린이 뉴스에서 접한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됐는지 고민해야 할 일이다. 현실은 전공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전공이나 같은 학문의 다른 시각을 수용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언론을 통해 나타나는 실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종합적인 지식과 유연한 시각이 필수적이다. 학문이 먼저가 아니라 ‘현실이 먼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득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 이론과 기술을 추구하는 자연과학도도 마찬가지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그가 미래에 무엇을 하건, 직접적으로는 조직 속에서 인간과 집단을 다뤄야 하고 도덕과 사회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과 기술이 적용되는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우리와 뉴스의 관계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뉴스에는 흥미와 관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즐거운 뉴스보다는 어둡고 불행한 뉴스가 더 잘 팔린다. 불행한 뉴스 속에는 불행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나와 가족 또는 사회의 불행을 피하려는 욕구가 들어 있다. 사건 사고와 재난 재해 뉴스가 여기에 속한다. 사람들이 밝은 뉴스를 하라고 요청하지만 이 주문에 따라갈 경우 뉴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결국 회사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일어났거나 자신과 사회에 직접 영향을 주는 뉴스가 주로 관심을 끈다. 대부분의 정치·경제·사회·국제 뉴스가 여기에 속한다. 뉴스 중에 상당한 분량에 나와 직접 관련이 적더라도 유명한 인물이나 사물이 들어간다. 또 사람들이 관심 갖는 뉴스는 로컬적이면서 글로벌한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그러나 글로벌한 뉴스를 원한다고 해외 뉴스를 잔뜩 집어넣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만국 공통으로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 보면, 뉴스와 언론은 사회를 쳐다보는 내 눈과 창에 해당한다.
어떤 뉴스에 관심을 보이는지는 내 눈과 창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내 생각의 틀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뉴스에 관심을 보이는지는 곧 나를 나타내면서 나를 결정한다. 나와 뉴스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이 어떤 뉴스와 언론에 접하느냐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를 쳐다보는지, 어떤 인간 유형인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인 일이다. 언론과 뉴스를 선택하면서 사람의 세계관과 성격, 성향이 결정되어가는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동시에, 언론은 한 사회와 국가의 성격과 품격을 보여준다. 어떤 언론이 한 사회에서 대우와 존중을 받으면서 활동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와 국가의 모습과 수준이 드러난다. 선진 사회에는 예외 없이 존중과 신뢰를 받는 언론이 존재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네트워크 뉴스, 영국의 BBC와 로이터 그리고 ≪디 에코노미스트≫를 빼고 그 나라를 설명하기 어렵다. 말을 바꾸면, 그런 언론이 없었다면 선진 사회가 되기 어려웠거나 선진 사회가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이런 언론은 공통적으로 시민과 국민을 위해 국가나 권력과 싸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의 선택과 전달
일반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하고 전달하는 일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의 선택과 전달의 과정이 기본적으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소한 사실을 묘사하는 과정을 살펴봐도 인간적 요인이 들어 있고 구조적 편향이 존재하는 등 그 요소가 다양하다. 거기에다가 특정한 경향이 지배하기도 한다. 언론의 차원으로 가면 복잡다기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언론은 상법상의 회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점에서는 헌법기관보다도 중요한 기능, 곧 사실의 전달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인식 형성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일, 곧 ‘사실’이 벌어지고 이 중에는 우리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실이 들어 있다. 인간이 혼자서 이 사실을 모두 좇을 수 없어 언론은 중요한 사실을 선택하고 정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언론은 사실을 선택하는 편집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사실을 넣거나 빼는 중요한 결정을 한다. 다음으로, 후속 편집과 취재 과정을 통해 특정한 사실을 크게 다루거나 반대로 아주 깡그리 무시할 수 있고, 정반대의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사실을 전하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특정한 요소를 부각하거나 아주 무시할 수 있다.
언론인은 인간이고, 사회적·정치적 존재다. 언론사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의 내외부에는 여러 겹의 구조가 존재하고 있어 언론과 언론인에게 영향을 준다. 곧 언론 내부적으로 개인과 회사의 편견과 욕심, 인연이 작용할 수 있고, 외부적으로 사회적·정치적 여건과 견해가 있다. 언론은 동시에 기업적으로 생존하고 번성해야 한다. 광고 여건이나 기업의 미래 조건 등 경제적 여건 등이 상수로 작동한다. 기업적 측면을 강조하는 기류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흥미로운 뉴스만을 집중적으로 몰아서 전해 옐로우 저널리즘을 수행한다. 신문과 방송이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제적 여건은 예전보다 훨씬 중요하고 원초적인 조건으로 등장해 사실의 선택과 전달에 영향을 미친다.
‘언론은 사실을 전할 뿐’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맞는 지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의 사실 선택과 전달 기능의 핵심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언론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언론만의 사적인 일이 아니다. 언론인이 어떻게 선정되고, 교육과 훈련을 받아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지, 언론인이 권력과 금력이 제공하는 부패의 고리에 연결되지는 않는지, 언론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은 모두 사회적 관심사에 들어간다. 이런 언론의 과정을 잘 이해하는 내외부 세력이 가만있을 리 없다. 따라서 언론의 과정에 영향을 주려는 내외부 세력의 존재와 행동 양태도 같은 이유에서 중요한 관심사다.
언론의 임무와 관련해 언론과 언론인은 사실의 선택과 전달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실을 점검해야 하는 무한대의 의무를 지닌다. 이 의무를 소홀히 해서 신뢰를 잃은 언론은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수준을 유지하는 언론은 항상 이 언론의 전반적 과정을 투명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만약 잘못이 드러난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정도正道다.
사실이 진실은 아니다?
언론의 사실 보도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일 큰 어려움은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대목이다. 수없이 많은 사실 중에는 진실을 담은 사실이 있고, 아주 악질적 경우에는 진실을 한 조각도 담지 않은 사실이 있다. 또는 진실을 덮기 위한 사실이 권력자의 힘을 빌려 버젓이 생산되고 권력의 입을 빌려서 유통된다. 독재와 부패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특히 이런 사례가 다반사여서 자유 언론은 독재나 부패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개입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경우, 진실을 덮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정치적 기도와 회견, 그리고 조사와 압력이 사실로 존재했다. 언론이 총체적으로 권력의 압박을 견디면서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사건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나 ≪워싱턴포스트≫의 승리로 끝나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항상 해피엔딩만 존재하지 않아서 권력에 지거나 힘과 타협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언론은 이런 진실을 알면서 거짓이 담긴 사실을 쓸 수도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실을 진실로 믿거나 또는 약간 의심하면서 전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진실은 거의 항상 사회 구성원, 특히 힘 있는 세력에게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언론이 혹시 진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판단과 결단의 용기가 필요하다. 또 증거가 부족해 진실을 쓰는 것을 망설일 수 있다. 그만큼 진실을 가로막는 요소와 여건은 부지기수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언론 ‘이해하기’와 뉴스 ‘뒤집어 읽기’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언론에 너무나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작금의 우리 언론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불만과 지탄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일반인들은 우리 언론에 대해 모두 비슷하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 요즘처럼 인터넷의 발전으로 1인 미디어까지 발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보도 통제가 어려워져 언론사와 저널리즘의 범람이 문제이지 위기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우리 언론을 잘 보면, 저널리즘을 제약하는 정치적·사회적 구조가 존재하고 언론이 여기에 쉽게 영합하는 행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가장 큰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언론이 사실을 사실로 판단하지 않고 사실을 유불리有不利와 호불호好不好로 점검해서 보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언론과 그 보도를 통해 사실 보도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생기고, 이런 언론에 의존하는 사람과 집단, 사회가 같은 경향을 지닌 채 존재하고 있다. 언론 보도를 추적해 보면 보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물론, 보도의 내용상에 극심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일련의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보도와 뉴스의 디바이드(나누기)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내가 2009년 4월 13일 저녁 앵커로서 마지막 방송을 한 뒤의 상황을 실례로 들여다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나의 앵커 하차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힘센 세력이 메인 뉴스 앵커의 말을 문제 삼아 도중하차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한국 방송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정치적·언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고, 방송사 내부에서 일어난 단순한 인사 문제는 아니었다. 일부 언론과 대부분의 인터넷 언론은 며칠 전부터 앵커 하차를 소상하게 전했다. 마지막 방송을 마친 다음 날 아침, 나는 조간신문을 보고 장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신문은 내가 그만둔 소식을 1면에 중요하게 다룬 반면, 어떤 신문은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 물론 사실의 선택과 서술, 편집은 언론사의 자유로운 결정에 속한다. 그러나 특정한 언론사가 나를 개인적으로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앵커 강제 하차를 뉴스로 다루지 않는다는 결정은 편집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내가 뉴스 진행에서 물러나게 된 정치적 배경도 궁금하지만, 언론 간에 엇갈라진 보도 결정 과정도 중대하고 궁금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앵커를 그만둔 지 거의 열 달에 들어가는 연초에는 우리 사회를 잘 보여주는 시사적인 일을 개인적으로 직접 겪었다. 거의 매일 헬스클럽에서 만나는 한 분이 왜 요즘 뉴스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느냐고 내 근황을 물어왔다. 이분은 나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를 논란 속으로 밀어 넣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정치적·사회적 소란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이로 미뤄보면, 이분은 러닝머신에서 나와 함께 뛰면서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보도와 뉴스의 나누기’가 우리 사회에 ‘사회 인식의 나누기’를 불러일으키고 공적·사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앵커 하차에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은 현재 한국 사회와 언론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나누기는 오랫동안 꾸준히 여러 사례에서 되풀이됐다. 미네르바와 그의 구속 그리고 무죄 판결, 신영철 대법관 사태, 미디어법 사태와 헌법재판소 결정의 집단 오보 사태, 정연주 KBS 사장의 축출과 무죄, 세종시 관련 보도, 4대 강 관련 소식 등 리스트가 매우 길다. 이런 나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라면 나누기 수준이 아니라 언론과 사회의 ‘내부적 분단’에 가깝다. 언론이 사실의 선택과 전달을 엄정하게 한다면 문제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지만 현실의 언론, 특히 우리 사회의 언론은 그렇게 단순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 언론은 총체적으로 한국 사회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래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뉴스를 열심히 읽는 동시에 ‘언론 이해하기’와 ‘뉴스 뒤집어 읽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뉴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언론 이해와 뉴스 뒤집어 읽기를 반드시 병행해야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 한국 사회를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오늘을 사는 한국의 지식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급변하는 언론 환경
언론에는 현재 세계적 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언론매체는 얼마 전까지 신문과 방송이 지배해 왔지만 요즘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특히 젊은 세대를 포함해 누구나 전통 언론매체에 대한 의존도를 급격하게 줄여가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획기적 발전과 라이프스타일의 급변으로 전통 언론매체는 더 이상 돈벌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서면서 신문과 방송의 위기는 엄살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다가서고 있다. 종이 신문의 사망 또는 종말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문을 닫는 신문사가 속출하고 있고, 문을 닫지 않더라도 기자의 숫자를 반 이하로 극심하게 줄이거나 종이 신문을 버리면서 웹 사이트 매체로 전환하는 결정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방송도 위기 국면에 들어선 점에서는 마찬가지여서 비즈니스 양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새로운 언론매체의 등장이 필연적인 상태에 들어섰다.
물론 기술의 발전에 따른 언론의 위기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인쇄술의 발명 이후 신문이 언론 시장을 지배하다가 전파의 발명 이후 나타난 라디오의 출현은 신문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라디오의 속보성과 친숙도, 영향력을 두고 신문들은 ‘언론의 종말’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현장의 영상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텔레비전의 출현 역시 신문과 라디오에 충격적이었다. 매체 사이에 경쟁이 있었고, 역할 분담 또는 공조를 통해 공존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기술의 성격상 호들갑이 아니다. 거기에 모든 지역과 세대에 걸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겹쳤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그래서 언론의 내일 모습과 존재 양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최근의 언론 위기를 심각하게 여기는 근본 이유는 ‘언론의 위기’가 ‘저널리즘의 위기’로 이어질 징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는 아무리 기술과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어 언론매체의 지형이 변한다고 해도 기존과 새로운 매체들이 언론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기는 다른 시기의 위기와 질적으로 다르다. 지난 시기의 위기에서는 언론 역할과 기능의 확장 내지는 변모로 위기를 극복했다면, 이번 위기에서는 고급 콘텐츠를 생산해 온 매체들이 거의 모두 고사 상태에 들어가 시장 퇴출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이런 언론의 위기를 이용해 언론을 억압하고 이용하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세력들이 설치고 있다.
이런 질적·양적 위기 속에서 저널리즘의 실행을 대체할 만한 콘텐츠 생산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이 심상치 않다. 포털은 ‘뉴스 전달 택배’ 내지는 ‘포장업자’에 그치면서 ‘사실의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 포털이 때로는 전달자 노릇에서 한계를 보여 사실의 선택과 포장에서 선정성을 띄고 있다. 인터넷 언론이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올드 미디어’가 확립해 온 신뢰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 확실하지 않다. 저널리즘의 콘텐츠가 위기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저널리즘의 존속 여부가 위기에 들어설 수밖에 없어 보이고, 최근 언론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겹쳐 보인다. 우리가 이번 위기를 극복해서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심화하는 언론매체의 변화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위기를 심화하고 촉진해서 정치·경제적 권력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시기로 들어갈지는 현재로서 알기 어렵다. 언론의 미래가 불투명할 뿐 아니라 사회의 장래도 역시 불투명하다.
언론의 전환기라는 현실과 시대적 중요성을 염두에 둔다면 젊은 세대는 뉴스 소비자로서 여러 책무를 지닌다. 우선 언론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횡행하는 유사 언론을 냉정하게 비판하고 골라내야 한다. 동시에 다음 시대를 책임져 나갈 만한 좋은 언론을 보고 골라내 성장할 수 있도록 이를 적극 소비해 줘야 한다. 우리 사회 모든 문제의 근원을 살펴볼 때 언론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책무는 중차대하다. 선배 세대들이 실패한 미완의 숙제에 해당하고 젊은 세대의 미래가 직결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