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문화와 교양, 넘치게 쌓아가기
3부 문화와 교양, 넘치게 쌓아가기
도서관,
환상의 공간 혹은 도래할 유혹의 공간
박태호
책의 유혹을 느낀 적이 있는지? 입시공부를 하던 직전까지의 과거는 아마도 책에 대해 그나마 있던 호감도, 그나마 책에서 느끼던 유혹도 모두 지워버렸을 성싶다. 입시생활이 여러분에게 제공한 최대의 기여가 좋든 싫든 일단 앉아서 일정 시간 동안 무엇을 읽고 쓰고 외우도록 하는 훈련이었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서 빼앗아간 최대의 즐거움은 이것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이는 책에서 어떤 호감이나 유혹을 느꼈던 사람에 한한 얘기지만 말이다.
사실 지금은 책에서 유혹이나 호감을 느끼기가 그리 쉽지 않은 시대임이 틀림없다. 재미있게 보고 듣고 놀 거리가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걸어 다닐 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음악을 듣고, 집에 가 앉으면 일단 텔레비전이 마중을 하고, 컴퓨터를 켜면 인터넷 웹 사이트, 수많은 동영상이나 영화들이 손을 내밀고 있고, 컴퓨터 게임은 ‘환상 속의’ 모험으로 유혹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방 한구석에 처박혀 아무 말 없이 그저 손 내밀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책이란 얼마나 낡고 재미없는 것인지.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음식이라도 1주일만 연달아 먹어보면 안다. 그 화려함이 얼마나 지속되기 어려운 것인지. 그에 비하면 밥은 지독히도 소박하고 밋밋하지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으며 나중엔 화려한 맛에 지쳐 결국 찾게 되는 음식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책은 그 겉모습에선 밥의 소박함을 닮았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책은 무척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책은, 처음에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시작하고 나면 때론 아주 흥미롭고 다채로우며 때론 퍽퍽하고 어렵지만 헤어나기 힘든 다양한 사건들이 기다리는, 게임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정말 여러 가지 음악을 들었고 지금도 좋아해서 여전히 매일 들으며 살지만, 사실 음악조차도 어느 때부턴가 비슷한 것들 사이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책은 보면 볼수록 봐야 할 것, 보고 싶은 것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 다양함이란 정말 갈수록 태산이다!
사실 지금이야 소박한 시골 아낙 같은 모습이지만, 책의 자태 또한 결코 이렇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책은 출판문화가 발달했던 서양에서도 18세기 후반까지는 귀한 물건이었고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귀족들의 집 내부를 그린 그림을 보면 화려한 장식장 위에 책이 대여섯 권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쇄술이 보급된 게 16세기임에도 여전히 책은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들어와 대량보급형 대중소설이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메커니즘과 결합해서 양산되기 전까지 책은 대개 함께 모여서 누군가가 읽어주는 물건이었고,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개 낭독의 형태를 취했다. 조선도 비슷해서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의 ‘소설’은 판소리처럼 모여서 읽어주면 울고 웃으며 함께 듣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퍼져갔다. 소설 아닌 책들도 비싸고 귀한 물건이어서 사대부 양반들 사이에서조차 빌려주고 빌려 읽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령 18세기 말 박지원은 장서가로 유명한 어떤 사람에게, 빌려주진 않으며 소유만 하는 사람에게 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책은 사람들 사이에게 공유되는 것이었고,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공유하게 하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정보든, 첨단의 문화를 만드는 기술이든, 혹은 도래할 세상에 대한 꿈이든 간에. 저 귀한 책들을 모아서 혼자 쓰다듬고 어루만질 게 아니라, 보고 싶은 모두가 함께 보도록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꿈이 ‘도서관’을 만들었다. 도서관에는 세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 세계에 대한 사유를 함께 나누려는 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책의 유혹
20세기 중반까지, 즉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사람들의 눈을 뺏기 전까지 어디서든 책은 첨단 지식과 문화를 배우는 가장 중심적인 매체였고, 세상을 앞서가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무기였으며, 육체적 한계로 인해 접할 수 없는 세계와 만나는 가장 일반적인 통로였다. 그것은 내가 보지 못한 무한한 세계들을 품고 있는 환상의 세계, 아니 환상의 공간 그 자체였다.
사실 책이 환상의 공간이 되었던 것 또한 일종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서구의 경우 한동안 그것은, 수많은 유혹과 싸우기 위해 책에 눈을 묻어야 했던 여러분처럼, 환상이나 유혹과 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16세기 플랑드르의 유명한 화가였던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그림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그림에서 성 안토니우스는 그를 유혹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푸코는 이를 “도서관 환상”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의 주위에는 벌거벗은 여인들이 가슴을 벌리고 있고, 탐욕은 기린 같은 목을 빼들고 있으며 술통처럼 생긴 남자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으며, 이름 모를 짐승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지상의 별난 인간들, 즉 주교, 왕, 권력자들이 행렬을 잇고 있다. 그러나 성자는 독서에 열중해 있는 나머지 그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그림에서 성자는 ‘자신을 유혹하는 악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그 책을 움켜잡고’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 환상”에서는 “저녁 하늘 위로 탐욕의 향기, 피와 분노의 냄새, 교만의 향, 황금의, 그 무게보다 더 진한 냄새, 동양의 여왕의 죄악의 향기가 피어오르게 된다. 책은 곧 ‘유혹’의 장소가 되었다.” 사실 가슴의 유혹을 글자가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책에 새겨진 그것은 단지 글자가 아니라 여인의 가슴이나 목을 빼든 탐욕보다 더욱 강한 또 다른 유혹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문턱으로 인도해야 할 책이 동시에 지옥의 문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세의 지식인들을 사로잡던 수많은 이교적인 책들, 심지어 이교도를 비판하기에 이교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했던 많은 책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특정한 신, 특정한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의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 사유, 그런 세계를 담고 있는 한, 책은 무엇보다 강력한 ‘유혹’이다. 그 유혹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여인의 가슴이나 황금빛 돈의 유혹은, 사소하다곤 할 수 없지만 결코 대단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가령 성 프란체스코 같은 이에겐 예수의 삶과 행적, 사유를 담은 책 한 권만으로도 많은 재산을 버리고 다른 종류의 삶으로 끌려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유혹이다. 아니, 새로운 세계 자체다. 라만차 돈키호테에게 책이란 곧 ‘세상’이었다. 돈키호테의 즐거운 여행의 1부가 책에 미쳐 책과 세상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한 독서광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면, 책의 2부는 자신의 삶을 글로 써 책으로 만들고는 그것을 들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미친 기사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이었던 마르크스가 책을 읽으며 자신이 사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전복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를 분석하는 위대한 책을 쓰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근대적인 양상으로 반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세계는 책이 되고, 책은 다시 세계가 되며 서로를 바꾸어놓는, 그러면서도 서로 쉽게 하나로 수렴되기보다는 차라리 점점 멀어지며 다른 모습의 세계가 증식되어 가는 기이한 순환이 이뤄진다.
도서관 환상
브뤼헐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을 보면서 플로베르G. Flaubert는 그것을 글로 옮겨 소설을 썼다. 그림을 대신해 기괴한 장면들을 묘사하는 글자들의 행렬이 지겨울 정도로 이어진다. 그래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푸코는 이 소설을 “고삐 풀린 몽상의 전범”이라고 말한다. ‘성 안토니우스의 환상’이란 이름을 빌어 사실은 플로베르 자신의 고삐 풀린 환상, 그 환상의 광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경 중세적이고 이교적인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러한 환상이란 플로베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교도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주장, 그들의 환상을 다룬 많은 책들을 읽어서 얻어낸 것이다. 티유몽의 <교회사>, 마터의 4권으로된 <그노시즘의 역사>, 아우구스티누스와 미뉴의 <교부학> 등. 이외에도 숱한 책들이 사용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냥 복제되며 동원되는 게 아니라, 그의 상상력 속에서 결합되고 변형이며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경우 몽상적인 것은 “인쇄된 기호들의 희고 검은 표면에서, 망각된 단어들의 비약으로 열리는, 먼지 앉은 닫힌 책들 속에서 태어난다.” 먼지 앉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선 서가에서, 그 서가들로 둘러싸인 책들 사이에서, 그 책들로 가득한 공간인 조용한 도서관에서. 환상들은 “그리고 그 도서관을 사방에서 둘러쳐 막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쪽의 불가능한 세계로 입 벌리고 줄지어 늘어선 책들과 그 제목들, 그리고 서가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로베르의 그 소설은 책들에서 길어낸 환상들로 채워진 책, 책들로 가득 찬 책이고, 따라서 하나의 도서관인 셈이다.
여기에서 푸코는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또 하나의 환상의 공간을 발견한다. 도서관에서 피어나는 저 환상은 이전에 흔히들 생각했던 것처럼 이성이 잠들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어떤 악마성의 작용이 아니며, 고삐 풀린 욕망이 만들어내는 미친 육체의 작용이 아니다. 브뤼헐이 책의 뒤쪽으로 밀어놓았던 이런 환상과 달리, 플로베르가 만들어낸 환상은 책 안에서, 책 사이에서, 책들이 놓인 서가에서, 책들로 가득 찬 도서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이성이 독서를 통해 창조한 환상이고, 긴장된 정신의 세심한 작용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박식함을 향한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젠 “꿈꾸기 위해선 눈을 감을 게 아니라 읽어야 한다.”
환상마저 지성의 작용으로 변형시킨 이러한 발상 속에서 도서관은 새로운 환상의 공간이 된다. 모든 책이 모여 있는 공간, 모든 지식이 모여 있는 공간, 그것은 이제 모든 환상이 만들어지는 지성적 환상의 공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모든 지식을 하나의 책에 정연하게 배열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지식을 대중에게 전하고자 했던 18세기 ‘백과사전파’의 계몽적 환상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모든 지식을 담는 하나의 책이 아니라 모든 책을 담는 하나의 공간이란 점에서 도서관은 백과사전의 연장인 것 같다. 그러나 백과사전이 이미 정렬된 지식을 빛으로 쏘아 어둠을 추방코자 했다면, 도서관은 배열된 책들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상이한 책들과 만나는 우연한 만남과 혼합의 공간이란 점에서 백과사전과 다른 거대한 여백을 갖는다. 이 여백이 백과사전과 달리 도서관을 환상의 공간으로 만든다.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J. L. Borges는 이런 점에서 이런 도서관 환상의 극한지대에 서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도서관장이 되기를 꿈꾸었고 실제로 도서관장이 되었던 사람, 도서관에 가득한 책을 정말 다 본 것은 아닐까 싶은 지독한 독서광, 책을 보며 눈이 멀어간 사람, 그리하여 책 속에 자신의 삶을 온통 투여했고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낸 사람. 이보다 더 도서관에 충실하고 이보다 더 도서관에 미친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 관한 소설을 쓴다. <바벨의 도서관>, 탑을 쌓아 신의 높이에 이르려던 사람들의 꿈을 이렇게 하나의 동일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믿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 거기에는 모든 책이 존재한다. 종종 어떤 이유로 인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는 책도 있지만, 그 책 역시 그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평생 동안 어떤 책을 찾아 거대한 도서관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책을 찾는 방법을 알 수 없다면, 그 책이 도서관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이 그럴듯한 질문이 수학에서의 존재증명의 타당성에 대한 질문을 패러디한 것임을 안다면, 보르헤스의 도서관이 인간의 모든 지식을 겨냥한 것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학자라면 다르게 대답했겠지만, 보르헤스라면 이렇게 대답할 듯하다. ‘그 책을 찾아다니는 동안 그는 눈에 걸리는 수많은 책을 보았을 것이고, 거기서 자신을 잡아끄는 유혹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며,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그 지식을 통해 새로운 환상, 새로운 꿈을 꾸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찾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러나 결코 찾지 못한 그 책은 바로 찾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찾아 나선 사람을 새로운 지식과 사유의 땅으로 이끌었던 게 아닐까?’
보르헤스가 그랬을까? 어쨌든 그는 책들에서 환상을 읽는 사람답게 수많은 저자와 책들을 인용하는 소설을 썼다. 자신의 소설은 도서관에서 자신이 만난 책들이 섞이며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듯. 그런데 그가 인용하는 책이나 저자는 실재하는 것도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도 있다. 없는 저자, 없는 책을 환상으로 지어내 인용하며 소설을 썼다. 그러나 있는 책과 없는 책을 구별하기란, 그처럼 도서관에 미쳐 빠져들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기 어렵다. 그는 없는 책에서도 환상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 우리로 하여금 없는 책을 찾아다니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는 책들과 지식, 사유를 만나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없는 책을 찾던 <바벨의 도서관> 의 그 사람들처럼.
기다림, 혹은 도래할 만남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 지금, 이런 도서관 환상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지난 몽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환상을 설파함으로써 여러분이 부재하는 책을 찾아 도서관을 헤매고 다닐 거라고, 책의 유혹에 빠져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순진한 몽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사실 백남준은 50년 전에 텔레비전과 비디오만으로도 이미 “종이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그는 항상 주머니에 신문이나 잡지를 넣고 다녔다는 역설을 보여주었다고는 해도, 그런 예언은 이미 어느 정도 가시화되어 일종의 상투구가 된 게 아닐까?
사실 도서관은 이미 보르헤스, 아니 플로베르를 사로잡았던 환상에서 벗어나, 시험공부를 하는 공간이 되어버렸고, 책은 실용적인 이유나 기능적인 이유가 아니고선 읽히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환상도 유혹도 상실한 지 오래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언젠가 어떤 하나의 만남만으로도 우리를 수면 아래 1만 미터 깊이로 잡아끄는 책의 유혹에 사로잡힐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 깊은 바다 속의 높은 수압을 견디며 생성된 압축된 환상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펼쳐지는 경이로운 체험을 할 사람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것을. 도서관의 먼지 앉은 서가에 줄지어 서 있는 저 책들이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찾아올 그런 사람일 것이고, 필경 도래할 그런 만남일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 그런 만남은 지금 아닌 어느 시대에도 빈번하지는 않았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다”고( 윤리학 ).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중요한 것들은 오직 그 드문 것들뿐이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의 운명, 책의 운명이 우리 시대에 유독 저주받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다시 말을 건네보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그 경이로운 환상을 경험해 보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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